책이 가지고 있는 명성에 비해 사실상 특별히 새로울 만한 내용은 없었다.

윤리학의 역사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라는 두 축 사이에서의 진자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시 그 두 범주를 사용하여 양 쪽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들을 택하여 알기 쉽고 실제적인 예화들을 사용해가며 논점의 차이들을 흥미롭게 부각시켜나간다. 그리고 결론부에 가서 자신의 견해인 ‘공동체주의’를 제시하며 목적론적 윤리의 손을 살짝 들어주는 것으로 책을 끝맺는다.

책을 읽으며,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주장하는 '덕의 윤리, 성품의 윤리'와 저자의 주장 사이의 연관성을 떠올려보게 된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샌델과 하우어워스는 각각 일반윤리와 기독교윤리의 영역에서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가장 주목받는 학자들인 셈인데, 이들은 가까이로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멀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제목으로 인해 정의에 대한 가슴 시원한 답변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내 사견이지만 이 책은 초강대국의 일류대학 강의실에서 나타나는 정의에 대한 담론이 가질만한 예상 가능한 약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저자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의 한계를 예리하게 짚어내면서 윤리의 영역에 공동체적 가치와 도덕을 복권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그가 좋은 관점을 가진 훌륭한 학자임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논의는 시종일관 제1세계 학자가 가진 관점의 한계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하긴 강의의 목적 자체가 정의를 추구하기를 촉구하는 것보다는 정의에 대한 사고를 자극하는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이같은 평가가 다소 야박한 감은 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주제보다는 저자의 탁월한 전달력에 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는 ‘강의란 무엇인가’를 더욱 확실히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샌델의 강의가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가 되었는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주제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여서, 읽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참고한다면 효과적인 전달과 소통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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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되자마자 단박에 밀리언셀러에 오르며 '정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한국사회가 얼마나 정의에 큰 관심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허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은 아니며 전세계적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정의’가 되어가고 있는듯 하다. 끝없이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그로인한 제3세계 기아와 질병 문제, 종교와 이념과 빈부 문제로 빚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테러, 인류공멸의 가능성까지 예상하게 만드는 심각한 환경파괴 등으로 인해 인류는 점차 진보의 환상에서 깨어나 자신들이 얼마나 불의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뼈져리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 역시 그 가르침과 실천을 통해 정의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앞으로 지금보다도 더욱 빠르게 그 영향력과 권위를 잃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의’라는 화두를 고민하며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주목해야 할 구약학자가 있다. 바로 월터 브루거만이다.
브루거만은 현존하는 구약학 최고 권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가진 독특한 신학적 강조점으로 학계와 교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학자이다.
학자로서 그의 신학적 입장이 가지는 의의를 말하자면, 그는 제1세계의 관점에서 주변부 신학으로 치부해버린 해방신학의 강조점을 제1세계 신학의 중심부에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는 예언자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저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약자와 소외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왕권의식으로 상징되는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예언자 전통에 대한 강조 등은 우리 시대의 교회가 반드시 귀기울여야 할 메시지이며 그 적실성은 앞으로 세대를 거듭해갈수록 더욱 커져갈 것이라 생각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부르거만의 대표작으로서, 이젠 당당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만한 책이다. 1978년에 발표된 그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브루거만 특유의 신학적 관심과 강조점들이 이 책 안에 이미 완성도 높게 표현되어 있음에 놀라게 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예언자적 전통’이라는 렌즈를 통해 모세, 예레미야, 제2이사야, 예수를 보는 방식은 내가 이전에 읽었던 여러 책들의 메시지와 오버랩되었는데, 그만큼 이 책이 이후 학자들과 목회자들, 운동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지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랍 벨의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를 보면, 책 전체에 흐르는 브루거만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브루거만을 읽어감에 있어서 개인적인 고민은 저자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열렬히 동의하지만, 그의 학문적 방법론과 보수적 성경읽기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을 어떻게 해소해갈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예컨대, 그의 중요한 강조점 중 하나인 ‘왕권의식과 예언자전통 간의 충돌’을 제시함에 있어서, 그는 구약 속의 군주제(특히 솔로몬)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적이다. 그에 의하면, 솔로몬은 이스라엘 안에 나타난 전제주의적 왕권의식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서 바로와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솔로몬시대에 전제정치와 압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음을 나도 인정하지만 브루거만의 해석은 지나치게 솔로몬과 그의 왕정(그 함의는 다윗왕조로까지 확대됨)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복음주의자로서 나는 성서 안에 나타나는 다양한 전승들(왕, 제사장, 예언자, 민중 등)간의 긴장과 충돌을 인정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가 비판적으로 배제되지 않고 건전하게 통합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싶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한국교회와 접촉점을 잃지 않고 소통해가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만약 우리가 브루거만보다 더 보수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브루거만처럼 변혁적이고 예언자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정의를 갈망하는 이 시대를 향해 대답할 수 있는 곳으로 교회를 준비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브루거만을 읽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씨름하고 살아내기를 소망해본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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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교육감이 결국 구속되었다.
처음 이 사건이 터졌을 때, 기가 막힌 타이밍에 표적수사를 펼친 그들의 후안무치함에 화가 났지만, 표적수사의 빌미를 제공한 곽교육감에게도 화가 나고 속상했었다.
얼마전 한 또라이가 신문사설에서 도덕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쿨한 진보로 거듭나자고 말했다지만, 누가 뭐라해도 개혁세력으로서 진보의 힘과 권위는 도덕성에서 나온다.
지금이라도 대가성이 밝혀진다면 곽교육감은 사퇴하고 처벌받는 것이 옳다. 그의 교육철학을 지지하고 교육감으로서의 그 분을 존경해왔지만 그래도 그게 옳다.

하지만 2억원을 둘러싼 여러 다른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고 대가성에 대한 어떠한 입증도 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구속까지 빛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 현 국면을 보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
불현듯 몇 달 전 읽었던 한권의 책이 떠올랐다. 책의 제목처럼 일부러 삼성을 생각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삼성이 생각났다.
초등학생에게 이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게하고 대한민국 사법부는 공정한가 묻는다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 그들이 곽노현 사건에 보이는 적극성과 기준을 가지고 삼성사건을 다루었다면 이건희 회장은 남은 여생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지내고도 형기가 한참 남을듯 하다.
피고의 힘과 지위에 따라 수사의 태도와 판결의 기준이 바뀐다면 그것은 검찰도 판사도 아니고 한낱 깡패와 잡배들일 뿐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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