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짐 월리스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저명한 투자전문가 짐 크레이머가 자신이 진행하는 TV프로에서  월 스트리트의 이윤추구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자 뜬금없이 레닌이 은행가의 재산을 몰수했던 사례로 대응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짐 월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실업률이 계속 상승하고 있는 와중에 납세자들의 돈으로 수십억의 보너스 잔치를 한 것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스탈린처럼 수백만 명을 학살하라는 끔찍한 주장이 아니라 상식과 균형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불평이나 대응도 하지 말고 이 터무니없는 기업 행위를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 같은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겪어야 했던 해악과 억압으로 고틍을 당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잘못된 양자택일 논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어쩌면 이리도 미국을 닮았는가! 그리고 짐 월리스의 답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적실한가!
병든 자본주의를 건강한 자본주의로 회복시키자는 것과 공산주의를 선택하자는 것의 차이는 초등학생조차 구별할 수 있다.
자신들의 배를 불려주는 병든 자본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면 모두 ‘공산주의자’ ‘좌빨’ '복지 포퓰리즘'이라 매도해 버리는 기만에 대해 이제는 단호히 “그만!”이라고 말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 더 늦기전에 끝없이 벌어지는 빈부격차를 완화할 방법을 모색하고 극빈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의 화두는 ‘복지’와 ‘지속 가능한 경제’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지금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한창이다. 
이번 선거에 '미리 보는 대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말들이 많다. 그런데 나경원의 지지율이 박원순을 턱 밑까지 추격하여 초박빙 양상을 보이고 있단다. 
GNP대비 복지수준이 가장 열악한 나라에서 초등학교 무상급식이라는 최소한의 복지요구를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여 시장직까지 내건 대단한 분의 빈자리를 나경원이 채우게 된다면 이 나라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그래서 이 상황이 나는 슬프다. 
어디까지 가려는가... 정녕 이 정도 고생으로도 부족했단 말인가...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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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강남 좌파'라는 화두를 처음 제기했던 장본인인 강준만이다.
그런데 용어의 저작권(?)을 가진 원조가 쓴 강남좌파론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이 책은 강남 좌파에 대한 비난도 아니며 그렇다고 옹호론도 아니다. 게다가 강남 좌파에 대한 기존의 개념정리 자체를 뒤엎어버린다. 심지어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란다.
이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라는 도발적 주장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전혀 공통점을 가늠해볼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만큼이나 혼란스럽다(이들이 모두 강남좌파? 심지어 박근혜까지??!!).

그가 강남 좌파를 말할 때의 '강남'은 지리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한국사회의 엘리트, 부유층,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상징언어이다. 강남 좌파의 ‘좌파’ 역시 이념적으로 반드시 왼쪽으로 분류된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이 위선이든 진정성 있는 것이든 간에 - 다수의 서민대중의 입장을 대변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언어이다. 이 프레임을 받아들인다면 왜 그가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라고 주장하는지 비로소 납득할 수 있게 된다.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고학력과 거기서 비롯된 상류층 인맥, 그리고 중산층 평균을 훨씬 웃도는 재력으로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대부분 이 ‘강남’이라는 상징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사들이다. 또한 정치인들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바, 민생을 돌보고 서민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게 되는데, 그러할 때에 - 실제로 그들이 취하는 노선이 좌이든 우이든 간에 - 그들은 좌파적 상징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모든 정치인은 자신의 생활양식(강남)과 정치적 슬로건(좌파)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 사이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각각의 정치인들에게 나타나는 이 괴리의 편차는 매우 크다.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같은 부류로 싸잡아 버리는 것이 저자의 의도는 결코 아니다).

저자는 강남 좌파의 정의를 이와 같이 확대한 후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인들(그의 분류에 따르면, 대부분 강남 좌파들이다)을 하나씩 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별 분석(대부분 미래의 유력대권주자)은 책의 본론이라기보다는 부록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출간된 책이므로 저자는 유력대권주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시해주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 책의 본론이라면 그가 책의 서두에서 강력히 주장했던, ‘한국 정치는 인물 중심의 정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순된다고 할 수 있겠다.
풍부한 자료제시를 바탕으로 한 강준만 특유의 흥미진진한 글쓰기는 이 책의 매우 큰 강점이다. 고 노무현,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에 대한 그의 흥미진진한 썰(?)풀기는 독자로 하여금 시간 가는줄 모르고 빠져들게 한다.
특히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일부 친노인사들의 과오에 대해 매우 강도높게 비판하는데 새겨들을만한 부분이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진보-보수 프레임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좀 더 직시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사실상 그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논점은 -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이념논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엘리트들 간의 밥그릇 싸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거칠게 말하자면, 강남 좌파로 불리게끔 만든 좌파 담론 또는 제스처가 정치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을 무슨 심각한 이념 투쟁인 양 포장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어느 정당 소속이건 다선 의원이 낙선한 지역의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 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출세, 입신양명, 인정욕구 충족의 도구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엘리트는 모두 ‘강남파’일 수밖에 없다. 강남 좌파에서 ‘좌파’는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제한된 정치적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승자 독식 상황에서 이념과 노선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쟁 세력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략적 도구의 성격이 강해진다.“  - <강남 좌파> p394

그가 이 책을 통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 장 - chapter11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은 입시전쟁(강남 좌파는 학벌 좌파) - 에서 드러난다. 그는 정치판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의 병폐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을 본다.
명문대 인맥을 통해 서로 얽히고 설켜있는 엘리트들이 유력인사에게 줄서기와 줄대기를 통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선거 한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뒤바뀌니 거기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승패가 갈리고 곧이어 승자와 승자에게 줄선 자들의 권력 독식이 이어진다. 결국 정치가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이 되는 것의 이면에는 학벌주의라는 거대한 몸통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학벌주의를 얼마나 극복해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실명을 통한 인물비평으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이 사람이 좋으냐 저 사람이 좋으냐'하는 품평보다는 우리의 정치 풍토와 한국 사회의 에토스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의 문제의식은 깊이가 있으며 해법 제시 역시 매우 예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결론이 용두사미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 결론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런 책 한권으로는 꿈적도 하지 않을 뿌리 깊은 학벌주의의 거대한 벽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로 그 견고한 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일으키려는 시도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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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IVP를 통해 톰 라이트의 에브리원 주석이 하나둘씩 출간되고 있습니다(저자는 주석이 학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일반대중과 괴리되어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 시리즈에 의도적으로 주석이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실제로 이 시리즈는 강해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톰 라이트를 참 좋아합니다. 그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가 우리 시대의 신약성서읽기를 풍성하게 하는데 그 어떤 신학자들보다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는 이천년 기독교신학의 역사 속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탁월한 글솜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대작인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에서 보여준 천재성과 그것을 여러 대중서적을 통해 일반독자의 눈높이로 흥미롭게 풀어내는 감각을 보면 아마 대부분 제 의견에 동의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이 주석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저는 뛸듯이 기뻤습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시리즈를 보며 군침을 흘리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이었습니다.

엊그제 드디어 첫 책으로 <마가복음>을 집어들고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책은 기대 이상입니다.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수행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대한 결과물이 충실히 반영된 주석입니다.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로 엮여진 수천페이지 분량의 연구가 주석 한 줄 한 줄에 알알이 배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방대한 내용들을 대중적인 언어로 이처럼 노련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 3탐구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한 명입니다('3탐구'라는 용어도 그가 제안한 것이지요). 
역사적 예수 연구의 2탐구는 비유대적인 예수상을 주로 제안하였는데, 상이성의 원칙을 극단적으로 적용할 경우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상이성의 원칙을 적용할 경우, 예수에 대한 전승이 유대교 전승이나 초기기독교회의 전승과 상이성을 보일 때 더욱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유사성을 보일 경우에는 유대교나 교회의 생각이 덧입혀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유대적인 예수와 기독교적인 예수를 배제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그리고 굳이 왜 그래야 할까요?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을 통해 기독교가 생겨났는데 오히려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생겨난 3탐구는 유대인으로서의 예수에 주목하며 예수 운동을 1세기 유대교의 맥락 위에 위치시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3탐구는 필연적으로 신구약 중간사, 신약성서 배경사,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를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1세기 이스라엘에서 예수 사건이 가졌던 의미를 깊이 이해하면서 복음서를 읽기 위해서는 이 3탐구 계열의 학자들의 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가장 완성도 높고 설득력 있는 전체 그림을 제시하고 있는 학자가 톰 라이트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풍성한 배경사와 본문에 대한 해석들은 쉬운 말로 풀어쓰고는 있지만 오랜기간 수행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깊은 내공에서 뽑아낸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마가복음 본문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고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높은 학문적 성취와 대중적 명성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의 예수 연구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유대적 배경에 집착하여 인위적인 일관성을 만들어내었으며 그 결과 예수 이해가 협소해졌다는 비판이 있습니다(저는 이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여러 비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연구에 있어서 그의 소위 '새 관점'은 존 파이퍼를 필두로 복음주의권의 맹폭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였던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이만큼 복음서의 역사적 진정성을 논증해내어 논의의 흐름을 되돌린 학자가 그 외에 또 누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 영역에 남겨두는데 만족하지 않고, 신학과 삶의 현장을 실제적으로 통합해내고자 줄기차게 노력하는 학자가 그 외에 또 누가 있을까요? 그것이 제가 톰 라이트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저 역시 톰 라이트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자의 모든 주장에 동의해야만 그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를 진심으로 권합니다. 복음서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를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현재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이렇게 세 권이 출간된 상태입니다). 그 시리즈를 통해 저자가 이 책 <마가복음>에서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해석들이 연원하고 있는 방대하고 탄탄한 학문적 기초와 논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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