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는 '강남 좌파'라는 화두를 처음 제기했던 장본인인 강준만이다.
그런데 용어의 저작권(?)을 가진 원조가 쓴 강남좌파론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이 책은 강남 좌파에 대한 비난도 아니며 그렇다고 옹호론도 아니다. 게다가 강남 좌파에 대한 기존의 개념정리 자체를 뒤엎어버린다. 심지어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란다.
이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라는 도발적 주장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전혀 공통점을 가늠해볼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만큼이나 혼란스럽다(이들이 모두 강남좌파? 심지어 박근혜까지??!!).
그가 강남 좌파를 말할 때의 '강남'은 지리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한국사회의 엘리트, 부유층,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상징언어이다. 강남 좌파의 ‘좌파’ 역시 이념적으로 반드시 왼쪽으로 분류된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이 위선이든 진정성 있는 것이든 간에 - 다수의 서민대중의 입장을 대변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언어이다. 이 프레임을 받아들인다면 왜 그가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라고 주장하는지 비로소 납득할 수 있게 된다.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고학력과 거기서 비롯된 상류층 인맥, 그리고 중산층 평균을 훨씬 웃도는 재력으로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대부분 이 ‘강남’이라는 상징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사들이다. 또한 정치인들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바, 민생을 돌보고 서민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게 되는데, 그러할 때에 - 실제로 그들이 취하는 노선이 좌이든 우이든 간에 - 그들은 좌파적 상징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모든 정치인은 자신의 생활양식(강남)과 정치적 슬로건(좌파)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 사이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각각의 정치인들에게 나타나는 이 괴리의 편차는 매우 크다.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같은 부류로 싸잡아 버리는 것이 저자의 의도는 결코 아니다).
저자는 강남 좌파의 정의를 이와 같이 확대한 후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인들(그의 분류에 따르면, 대부분 강남 좌파들이다)을 하나씩 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별 분석(대부분 미래의 유력대권주자)은 책의 본론이라기보다는 부록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출간된 책이므로 저자는 유력대권주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시해주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 책의 본론이라면 그가 책의 서두에서 강력히 주장했던, ‘한국 정치는 인물 중심의 정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순된다고 할 수 있겠다.
풍부한 자료제시를 바탕으로 한 강준만 특유의 흥미진진한 글쓰기는 이 책의 매우 큰 강점이다. 고 노무현,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에 대한 그의 흥미진진한 썰(?)풀기는 독자로 하여금 시간 가는줄 모르고 빠져들게 한다.
특히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일부 친노인사들의 과오에 대해 매우 강도높게 비판하는데 새겨들을만한 부분이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진보-보수 프레임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좀 더 직시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사실상 그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논점은 -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이념논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엘리트들 간의 밥그릇 싸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거칠게 말하자면, 강남 좌파로 불리게끔 만든 좌파 담론 또는 제스처가 정치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을 무슨 심각한 이념 투쟁인 양 포장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어느 정당 소속이건 다선 의원이 낙선한 지역의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 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출세, 입신양명, 인정욕구 충족의 도구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엘리트는 모두 ‘강남파’일 수밖에 없다. 강남 좌파에서 ‘좌파’는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제한된 정치적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승자 독식 상황에서 이념과 노선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쟁 세력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략적 도구의 성격이 강해진다.“ - <강남 좌파> p394
그가 이 책을 통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 장 - chapter11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은 입시전쟁(강남 좌파는 학벌 좌파) - 에서 드러난다. 그는 정치판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의 병폐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을 본다.
명문대 인맥을 통해 서로 얽히고 설켜있는 엘리트들이 유력인사에게 줄서기와 줄대기를 통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선거 한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뒤바뀌니 거기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승패가 갈리고 곧이어 승자와 승자에게 줄선 자들의 권력 독식이 이어진다. 결국 정치가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이 되는 것의 이면에는 학벌주의라는 거대한 몸통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학벌주의를 얼마나 극복해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실명을 통한 인물비평으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이 사람이 좋으냐 저 사람이 좋으냐'하는 품평보다는 우리의 정치 풍토와 한국 사회의 에토스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의 문제의식은 깊이가 있으며 해법 제시 역시 매우 예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결론이 용두사미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 결론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런 책 한권으로는 꿈적도 하지 않을 뿌리 깊은 학벌주의의 거대한 벽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로 그 견고한 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일으키려는 시도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