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쯤 접하게 되는 문제의 그 책이다.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과 여러 독서가들의 호평 속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으나 결과적으로 나에겐 좀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자기 분야에 출판되는 대부분의 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직업인들, 가령 학자나 출판업자에게는 이 책의 논지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하지만 그것도 그들에게 이 책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다기보다는 이미 사용해 오던 방법의 의의에 대해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해주는 책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규모없는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의 과격한 주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책들 사이의 지형도를 파악하는 것이 손에 잡히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어제끼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어느 한 책으로 치우쳐 버리지 않고 책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제목과 목차, 카탈로그 외에는 결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는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의 사서의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자기 분야에 출판되는 대부분의 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직업인들, 가령 학자나 출판업자에게는 이 책의 논지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하지만 그것도 그들에게 이 책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다기보다는 이미 사용해 오던 방법의 의의에 대해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해주는 책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규모없는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의 과격한 주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책들 사이의 지형도를 파악하는 것이 손에 잡히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어제끼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어느 한 책으로 치우쳐 버리지 않고 책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제목과 목차, 카탈로그 외에는 결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는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의 사서의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 사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책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교양에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독서에도 틀려먹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존재하는 책들의 수를 고려할 때, 우리로서는 사서처럼 총체적 시각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갈 것인지 하는 선택이 불가피하며, 전체를 통제한다는 측면에서는 모든 독서가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에너지 낭비인 것이다.
이 입장의 지혜로움은 진정한 교양은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러한 전체성의 추구는 개개의 책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이 책 전체는 이와 같이 일면 맞는 말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궤변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결코 말해서는 안된다는 죄책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체한다. 가령, 책읽기보다 책들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던지, 다른 사람이 책에 관해 하는 얘길 귀동냥해도 충분하다던지, 읽고나면 어차피 다 까먹어서 안 읽은 것과 똑같이 되버린다던지, 심지어는 내가 안 읽고 이야기해도 결국 딴 사람도 안 읽었거나 까먹어서 잘모른다는 등의 논리이다(저자의 주장을 희화화한 측면도 있지만 저자 역시 익살맞은 문체로 자신의 주장을 약간은 희화화해가며 설명해가고 있으므로 뉘앙스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저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단계씩 쌓아올린 논지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의 마지막 장(대처요령 제4장 자기 얘기를 할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해 말하면서 비평 자체가 텍스트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창의적인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화가에게 자연이 작품의 소재로서의 부차적인 위치만 가지는 것처럼 비평가에게 텍스트 역시 비평이라는 작품의 소재로서의 부차적인 위치만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에 담긴 정확한 사실을 알고 비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텍스트를 매개체로 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해나가라고 역설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 창의성이 질식되어버린 사람들(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주장이다. 나에게도 마지막 장은 이 책에서 가장 유익했던 장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이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전제가 읽는 내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타나는 독서의 목적, 그리고 책에 대한 담론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 정도인 듯 하다.
첫째는, 지식인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과 권위를 나타내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이 권위는 그 전문가가 자기 분야의 꽤 비중있는 저서에 대해 "그 책 안 읽었는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심각하게 손상된다. 따라서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술은 필수적이다).
둘째로, 교양인들 사이의 사교활동의 수단이다(여기서도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기술이 중요하다).
하긴 나 역시 학자연하기 위한 허영심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독서의 동기, 그리고 책을 둘러싼 담론에는 분명 그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책 읽기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
저자가 아무리 책에 대한 총체적 조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를 유혹하고, 망각의 힘을 이야기하며 나의 독서의욕을 꺾고(?) 허무감에 빠뜨려도, 나는 여전히 '책 한권과의 깊은 만남'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 역시 사역자로서, 주위사람들에게 책을 소개할 기회도 자주 있는 편이며, 따라서 신앙서적과 일반서적을 균형있게 다독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익한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한 권 한 권의 책을 정독해 나가는 것의 기회비용이 책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놓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생각을 자라게 하고 삶을 변화시킨 것은 책에 관한 정보나 전체적인 조망이 아니라 각각의 책과의 깊은 만남이었다.
무질의 사서는 한 책에 빠져 균형을 잃지 않고 책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아무 책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독서는 영향받고 설득당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무비판적으로 독서한다는 뜻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는 것조차 그 과정을 통해 저자의 생각과 교류하고 성장하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망각의 힘은 대단하다. 나에게 지금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책도 몇 년이 지나면 읽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로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에 담긴 정보는 잊혀진다 할지라도 책과 나 사이에 일어난 생각의 상호 교류는 계속해서 나의 가치관과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망각의 힘에 굴복하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는 이유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성실히 소개할 책임이 있는 전문인은 논외로 하자(기독교 전임사역자는 그 범주에 속할까 아리송했지만 나는 속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사역자는 평생 성실히 공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는 사람은 아니다).
책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할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기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읽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책과의 진지한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책 정보와 저자 이름 나열해 가며 학자연하고 싶은 지적 허영심에 대한 좋은 해독제가 될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 책보다는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도 있다)을 권하겠다. 애들러는 1~4단계의 독서법을 소개한 후, 각각의 책의 중요성에 따라 그에 맞는 단계를 적용하여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건강하고 균형잡힌 가이드라고 생각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읽어보니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여 공격했다는 혐의를 피할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좋은 동기로 쓰여진 책임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책이 꽤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책이기 때문에,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의 좋은 습관을 망칠수도 있는 위험성이 느껴져 나름 반박의 글을 써보았다. 어차피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자신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매개로 하여 내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나갔으니 자기 책의 마지막 장을 충실히 실천했다고 오히려 나를 칭찬해주지 않을까?
"...책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교양에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독서에도 틀려먹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존재하는 책들의 수를 고려할 때, 우리로서는 사서처럼 총체적 시각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갈 것인지 하는 선택이 불가피하며, 전체를 통제한다는 측면에서는 모든 독서가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에너지 낭비인 것이다.
이 입장의 지혜로움은 진정한 교양은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러한 전체성의 추구는 개개의 책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이 책 전체는 이와 같이 일면 맞는 말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궤변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결코 말해서는 안된다는 죄책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체한다. 가령, 책읽기보다 책들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던지, 다른 사람이 책에 관해 하는 얘길 귀동냥해도 충분하다던지, 읽고나면 어차피 다 까먹어서 안 읽은 것과 똑같이 되버린다던지, 심지어는 내가 안 읽고 이야기해도 결국 딴 사람도 안 읽었거나 까먹어서 잘모른다는 등의 논리이다(저자의 주장을 희화화한 측면도 있지만 저자 역시 익살맞은 문체로 자신의 주장을 약간은 희화화해가며 설명해가고 있으므로 뉘앙스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저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단계씩 쌓아올린 논지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의 마지막 장(대처요령 제4장 자기 얘기를 할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해 말하면서 비평 자체가 텍스트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창의적인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화가에게 자연이 작품의 소재로서의 부차적인 위치만 가지는 것처럼 비평가에게 텍스트 역시 비평이라는 작품의 소재로서의 부차적인 위치만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에 담긴 정확한 사실을 알고 비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텍스트를 매개체로 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해나가라고 역설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 창의성이 질식되어버린 사람들(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주장이다. 나에게도 마지막 장은 이 책에서 가장 유익했던 장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이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전제가 읽는 내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타나는 독서의 목적, 그리고 책에 대한 담론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 정도인 듯 하다.
첫째는, 지식인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과 권위를 나타내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이 권위는 그 전문가가 자기 분야의 꽤 비중있는 저서에 대해 "그 책 안 읽었는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심각하게 손상된다. 따라서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술은 필수적이다).
둘째로, 교양인들 사이의 사교활동의 수단이다(여기서도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기술이 중요하다).
하긴 나 역시 학자연하기 위한 허영심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독서의 동기, 그리고 책을 둘러싼 담론에는 분명 그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책 읽기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
저자가 아무리 책에 대한 총체적 조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를 유혹하고, 망각의 힘을 이야기하며 나의 독서의욕을 꺾고(?) 허무감에 빠뜨려도, 나는 여전히 '책 한권과의 깊은 만남'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 역시 사역자로서, 주위사람들에게 책을 소개할 기회도 자주 있는 편이며, 따라서 신앙서적과 일반서적을 균형있게 다독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익한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한 권 한 권의 책을 정독해 나가는 것의 기회비용이 책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놓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생각을 자라게 하고 삶을 변화시킨 것은 책에 관한 정보나 전체적인 조망이 아니라 각각의 책과의 깊은 만남이었다.
무질의 사서는 한 책에 빠져 균형을 잃지 않고 책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아무 책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독서는 영향받고 설득당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무비판적으로 독서한다는 뜻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는 것조차 그 과정을 통해 저자의 생각과 교류하고 성장하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망각의 힘은 대단하다. 나에게 지금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책도 몇 년이 지나면 읽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로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에 담긴 정보는 잊혀진다 할지라도 책과 나 사이에 일어난 생각의 상호 교류는 계속해서 나의 가치관과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망각의 힘에 굴복하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는 이유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성실히 소개할 책임이 있는 전문인은 논외로 하자(기독교 전임사역자는 그 범주에 속할까 아리송했지만 나는 속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사역자는 평생 성실히 공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는 사람은 아니다).
책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할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기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읽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책과의 진지한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책 정보와 저자 이름 나열해 가며 학자연하고 싶은 지적 허영심에 대한 좋은 해독제가 될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 책보다는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도 있다)을 권하겠다. 애들러는 1~4단계의 독서법을 소개한 후, 각각의 책의 중요성에 따라 그에 맞는 단계를 적용하여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건강하고 균형잡힌 가이드라고 생각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읽어보니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여 공격했다는 혐의를 피할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좋은 동기로 쓰여진 책임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책이 꽤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책이기 때문에,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의 좋은 습관을 망칠수도 있는 위험성이 느껴져 나름 반박의 글을 써보았다. 어차피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자신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매개로 하여 내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나갔으니 자기 책의 마지막 장을 충실히 실천했다고 오히려 나를 칭찬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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