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1,2>, 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

요즘 신학 유튜브방송을 찍고 있습니다. 첫 책으로 김용규 선생의 <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김용규 선생의 팬이라고 밝혔는데(https://youtu.be/l9nX8GZUX7I),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저를 그 분의 팬으로 만든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1,2>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 저에게 이 분은 다방면의 방대한 지식과 아주 탁월한 글솜씨를 가진 인문학자 정도였습니다. 세상에 감탄할만치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은 워낙 많습니다.
저는 감탄은 매우 잘하는 편입니다만, 그가 자신의 지식과 글로 하려는 일에 동의하고 동감하게 될 때에만 그 학자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이 분의 책들이 주로 인문학적 교양서인지라 매번 감탄하며 읽지만 정작 어떤 생각을 가진 분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작가가 자신의 패를 보여준 책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이 책에서 이 분의 패를 보았고 그래서 팬이 되었습니다.
인문학자 김용규의 진면목이 궁금하다면 이 두 권의 책을 권해드립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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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 & 닐스 길리에, 이학사

 

신학을 컨텐츠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 신학블록버스터 https://youtu.be/ycZungwllU8 )
첫 책이 신학과 철학을 함께 다루는 책이라 방송 시작 전에 철학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뭔가 시작할 때 기합이 빡 들어가는 성격 탓에, 쓸만한 서양철학사 책을 찾아 한동안 여러 서점과 도서관의 철학 코너를 뒤지고 돌아다녔습니다.
고된 리서치와 발품 끝에 선정한 서양철학사 원픽 도서는 군나르 시르베크 & 닐스 길리에의 <서양철학사>입니다.

공저자인 군나르 시르베크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이 책은 이들이 일반 대학생을 위한 교양 철학 교재로 쓴 책입니다.
입문서라면 비전공자가 조력자 없이 텍스트만 읽고도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기술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철학 문외한도 정신줄만 단단히 붙잡고 읽으면 이해 못할 내용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평이한 문체로 쓰여져 있습니다.
대가의 쉽고 간결한 설명에 여러번 감탄하며 '제대로 이해한 사람만이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 책입니다.
벽돌책 단권 분량의 서양철학사 중에서 가독성은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시대별 분량 배분도 알맞고, 현대철학에서 유럽과 영미철학의 분량 배분도 적당합니다. 또한 그 어떤 서양철학사 책보다 연관학문들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입니다. 
철학 입문서로서 여러 면에서 균형과 적절함을 보여주는 흠잡을 데 없는 책입니다.

한 블로거가 우스갯소리로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인지도'라고 하더군요.
철학비전공자가 이 정도 볼륨의 서양철학사 책을 여러 권 읽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테니 이왕이면 러셀이나 렘프레히트, 힐쉬베르거 등을 읽는게 어디 가서 생색내기 더 좋지 않겠냐는 거지요.(ㅋㅋㅋ)
독서의 목적이 어디 가서 젠체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신경쓸게 없는 단점이 되겠네요.^^
이 책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이 책이 앞서 언급한 유명한 서양철학사 책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하나 하자면, 이 유일한 단점은 10년 내에 사라질 것입니다. 이 책은 향후 10년 이내에 렘프레히트, 또는 스텀프의 책을 끌어내리고 입문서의 왕좌에 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러셀의 책은 완성도에 대한 비판도 많이 받고 있지만 이미 하나의 인문학 고전이자 브랜드가 되어 있으므로 논외로 하겠습니다.)

일독의 유익도 상당했지만, 다 읽었을 때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다섯번 정도는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학문입니다.
관심분야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쌓을 목표로 철학에 도전하기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신학블록버스터 2화에서 소개한 책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181IZglChw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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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현대철학>, 철학아카데미, 동녘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 스터디모임을 하면서 읽게 된 책이다.
독일현대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할 때 읽을 입문서로 제격이다.
맑스, 프로이트, 니체, 후설, 로자 룩셈부르크,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가다머, 하버마스, 악셀 호네트를 다루고 있다. 
각 사상가들을 전공한 국내학자들이 입문자를 염두에 두고 최대한 알기 쉽게 써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 한나 아렌트를 다룬 부분이 크게 유익했다.
특히 로자 파트에서 '혁명에 있어서 대중은 어떻게 능동적 주체가 되어가는가'를 다룬 부분은 복음주의학생운동에서의 학생자발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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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21세기북스

저자 박찬국은 하이데거에 대해 알기 쉽게 가르치는 것으로 정평이 난 학자입니다.
최근 출간된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동저자의 이전 저서인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http://warinlife79.tistory.com/264와 굳이 두 권 모두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용이 겹칩니다.
하이데거 입문서로는 국내에 이 저자의 책만한 것을 찾기 힘드니 둘 사이의 차이점을 기준으로 어느 책을 읽을지 정하면 될 듯 합니다.
하이데거의 사상을 그의 생애와의 연관성 속에서 공부하고 싶다면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가 낫겠고, 사상만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가 더 낫습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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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동녘

 

시니어간사님들과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 스터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첫 모임을 마치고 난 후에 확실히 깨달은 것은, <두 지평>이 다루는 주요사상가 4- 하이데거, 불트만, 가다머, 비트겐슈타인 - 에 대한 전이해 없이는 저와 이 책 사이에서 지평융합(?)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하이데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하이데거를 이 정도 노력으로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입문 수준의 이해에라도 이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 책 저 책 더듬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만난 좋은 책이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입니다.

저자 박찬국 교수는 국내에서 하이데거를 가장 명료하게 가르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학자입니다.

그가 하이데거의 사상을 더 잘 풀어낸 다른 책도 있지만, 하이데거의 사상만이 아니라 생애와 주요사건도 함께 다룬 책을 읽고 싶어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생애를 전기와 나치 참여 시기, 그리고 후기로 나누어 간단히 다루고, 각 시기별로 나타난 그의 사상의 요체를 대표적인 저작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하이데거도 하이데거지만, 오히려 저자인 박찬국 교수에게 감탄했습니다.

무언가를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늘날 하이데거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해석 역시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겠지만, 그 난해한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토록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는 저자의 내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워낙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저도 주워들은 말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이해를 유보(?)한 채 머릿속에 남아 있던 주워들은 말의 파편들을 서로 꿰어주고 하이데거 사상의 큰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이데거가 현대철학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철학자로 평가받는 이유를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이데거를 통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유익뿐만 아니라, 의외로 신앙에 대한 자극과 통찰도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이데거는 철저히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철학을 전개하지만, 그의 사상에는 기독교사상과 조응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하이데거의 사유 역시 그보다 앞선 시대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는데, 하이데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근현대철학자로 보통 니체, 키에르케고르, 후설을 꼽습니다.

이 중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력이 가장 덜 언급되지만, 그의 사유 곳곳에는 생각보다 키에르케고르의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 ‘죽음에의 선구’, ‘존재의 개현등의 아이디어는 키에르케고르의 핵심사상인 절대자 앞에서의 실존적 결단의 탈신앙적 버전이라 할만치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하이데거를 공부하다가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존재가 되어갈 것인가등의 우리 신앙의 묵직한 질문들에 대해서, 저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기독교적으로 전유할 때 얻을 수 있는 통찰과 유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불트만이 했던 것이 그 작업이긴 하지만, 보수 기독교는 불트만의 사상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주의권에서도 폭넓게 수용될 만한 새로운 버전이 나타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참으로 위대한 사상가이지만, 어두운 면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긴 나치 참여 전력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가 있고 팩트에 대해서도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초기에는 그가 히틀러와 나치의 실체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하다가 나치의 실상을 알게 된 후 점차 소극적 동조 내지 소극적 비판으로 돌아선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하이데거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이로 인해 그는 나치에게 감시당했고 2차대전 말 참호공사에 동원되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고 합니다(이 주장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나치 초기부터 다른 많은 지성인들은 이미 나치의 문제점을 깨닫고 반대했는데 당대 최고의 지성이 한 때 나치에 적극 협력하여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동참하게 만들었다는 점, 나치의 실상을 깨닫고 나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침묵에 가까운 소극적 태도에 머물렀다는 점, 죽는 날까지 명확한 사죄나 참회 없이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한 것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지만, 나치 협력 시기의 하이데거가 철학하는 민족으로서의 독일인의 우월성과, 그에 따른 사명과 책임을 믿었다는 점이 그가 나치에 참여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 하나의 이유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를 헛똑똑이로 전락시킨 것이 철학하는 자신, 그리고 철학해온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이었음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씁쓸합니다.

 

평생 겸손히 배우며 죽는 날까지 많이 안다 현명하다 생각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며 눈을 부릅뜨고 시대의 흐름을 읽으며 살기를,

그래서 부지중에라도 악에 힘을 보태는 삶 살지 않기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망해봅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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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한창 붐일 때도 관심없었고 저자의 최근 강연꼬장사태 이후 더욱 관심없었는데, 스승님이 빌려주시면서까지 강추하셔서 읽게 된 책이다.


'(근대) 규율사회가 (후기근대) 성과사회로 전환되면서 타자에 의한 착취가 자기 착취로 바뀌었고, 그 자기착취의 결과로 나타나는 대표적 병리현상이 우울증'이라는 저자의 진단은 매우 예리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가 자기 착취로 바뀌었다는 진단에는 절반 정도만 동의하게 된다.
나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도 여전히 타자에 의해 착취당하는 사회다.
다만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더 쉽게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 바로, 개인의 욕망과 두려움을 자극하여 스스로 열심히 자기착취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급모순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해소된 독일 같은 곳에서는 저자의 진단이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사회에는 차라리 오찬호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보여준 진단이 더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역시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학자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느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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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신, 괴물>은 해체주의 이후의 철학과 신학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주요한 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커니의 삼부작 중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현대 철학의 핵심이슈인 '타자성'개념을 대중문화(영화 '에일리언', '지옥의 묵시록')와 문학('햄릿', 조이스의 '율리시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비극적 사건(911 테러)등을 두루 살피며 고찰하고, 타자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모색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의 주장을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커니는 우리가 근본주의로 귀결되는 극단적 실재론의 태도나 윤리적 응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도의 극단적 해체주의의 태도 중에서 양자택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별의 해석학'을 통한 제3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커니는 해체주의의 발흥 속에서 나타난 여러 논의들, 가령 '공포스러운 숭고(크리스테바), 기괴한 숭고(지젝)'  개념 속에 나타나는 윤리적 모호함의 흔적들에 우려를 표명한다. 이러한 우려는 그의 하이데거 비판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이데거적인 신성에서는 존재론적/미학적 차원이 윤리적 차원보다 우위를 점한다. 즉, 하이데거에게서 윤리는 미학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커니는 하이데거에서부터 최근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점차 윤리적 분별과 실천의 중요성과 당위성이 약화되어가는 미묘한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믿기로는 해체주의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가 종말론적 지평 위에 서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해체주의 이후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신은 근본주의적 폐쇄성을 띄는 닫힌 미래를 제시하는 '계시의 신'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신'이라고 본다(그래서 그의 대표작의 이름이 'The God who may be'이다).


이 같은 종말론적 왕국은 이것이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순환적 '사건', 종국적으로 회귀하는 동일한 기원의 사건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 너머"에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왕국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신이 지금까지 상상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종말론적 기대에는 윤리적 급박함이 있다. 만약 "가능한 도래"가 실제로 예측하지 못한 놀라움으로 밤중의 도둑처럼 온다면, 그것은 가장 약한 자의 얼굴을 통해 올 것이다. 즉 "이들 중 가장 작은 것들"의 울부짖음으로,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과부와 고아, 고뇌에 가득 찬 자, 주린 자의 얼굴을 통해 올 것이다. 이 같은 윤리적 요청에 대답하려면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이방인, 신, 괴물> p412



계몽주의 시대의 인식론의 특징은 실재/진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실재/진리와 분명히 접촉할 수 있고 오해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러한 자신만만한 '실재론'은 포스트모던시대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붕괴를 이끈 일련의 흐름을 "해체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해체주의가 계몽주의 시대의 오만과 독단을 해체하려다 진리 자체를 해체해버린 후, 이제 더이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해체주의 이후 세계는 인식론적 무지와 윤리적 모호함에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최근 학문의 여러 영역에서 포스트모던의 극단을 찍고 다시 중간지대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가령, '비판적 실재론').

그러나 비록 커니가 판별의 해석학을 강조하고 선악은 윤리적 기준으로 다루어야지 미학적으로 모호하게 악의 심각성을 흐리면 안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의 인식론의 위치는 분명 비판적 실재론자보다는 해체주의자에 더 가깝다. 그는 해체주의로 분류되는 학자군 안에서 약간의 중도회귀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 정도로 볼 수 있을거 같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커니는 해체주의자가 아니라는 반론도 가능할지 모르나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디테일은 식별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수록 큰 차이도 점점 더 작아보이는 법이다. 나의 신학적 스탠스에서 볼 때 커니와 여타 더 강고한 해체주의자들(데리다, 카푸토, 리오타르 등) 간의 차이는 새누리당에서 보기에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마땅한 예를 못 찾았을 뿐이다. 새누리당... 나는 그 정도의 꼴통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리처드 커니를 알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해체주의자들 안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해준 신선한 만남이었다. 해체주의 안에 보여지는 다양성들을 보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단순화된 이해도 어느 정도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식론에 있어서 해체주의와 같은 극단적 관점주의가 나의 견해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그래도 온건한 실재론자로서 이러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책을 통한 소통을 시도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듯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타자성의 철학'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졌다. 이제 다음은... 레비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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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가지고 있는 명성에 비해 사실상 특별히 새로울 만한 내용은 없었다.

윤리학의 역사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라는 두 축 사이에서의 진자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시 그 두 범주를 사용하여 양 쪽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들을 택하여 알기 쉽고 실제적인 예화들을 사용해가며 논점의 차이들을 흥미롭게 부각시켜나간다. 그리고 결론부에 가서 자신의 견해인 ‘공동체주의’를 제시하며 목적론적 윤리의 손을 살짝 들어주는 것으로 책을 끝맺는다.

책을 읽으며,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주장하는 '덕의 윤리, 성품의 윤리'와 저자의 주장 사이의 연관성을 떠올려보게 된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샌델과 하우어워스는 각각 일반윤리와 기독교윤리의 영역에서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가장 주목받는 학자들인 셈인데, 이들은 가까이로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멀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제목으로 인해 정의에 대한 가슴 시원한 답변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내 사견이지만 이 책은 초강대국의 일류대학 강의실에서 나타나는 정의에 대한 담론이 가질만한 예상 가능한 약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저자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의 한계를 예리하게 짚어내면서 윤리의 영역에 공동체적 가치와 도덕을 복권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그가 좋은 관점을 가진 훌륭한 학자임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논의는 시종일관 제1세계 학자가 가진 관점의 한계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하긴 강의의 목적 자체가 정의를 추구하기를 촉구하는 것보다는 정의에 대한 사고를 자극하는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이같은 평가가 다소 야박한 감은 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주제보다는 저자의 탁월한 전달력에 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는 ‘강의란 무엇인가’를 더욱 확실히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샌델의 강의가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가 되었는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주제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여서, 읽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참고한다면 효과적인 전달과 소통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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