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신, 괴물>은 해체주의 이후의 철학과 신학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주요한 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커니의 삼부작 중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현대 철학의 핵심이슈인 '타자성'개념을 대중문화(영화 '에일리언', '지옥의 묵시록')와 문학('햄릿', 조이스의 '율리시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비극적 사건(911 테러)등을 두루 살피며 고찰하고, 타자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모색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의 주장을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커니는 우리가 근본주의로 귀결되는 극단적 실재론의 태도나 윤리적 응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도의 극단적 해체주의의 태도 중에서 양자택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별의 해석학'을 통한 제3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커니는 해체주의의 발흥 속에서 나타난 여러 논의들, 가령 '공포스러운 숭고(크리스테바), 기괴한 숭고(지젝)' 개념 속에 나타나는 윤리적 모호함의 흔적들에 우려를 표명한다. 이러한 우려는 그의 하이데거 비판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이데거적인 신성에서는 존재론적/미학적 차원이 윤리적 차원보다 우위를 점한다. 즉, 하이데거에게서 윤리는 미학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커니는 하이데거에서부터 최근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점차 윤리적 분별과 실천의 중요성과 당위성이 약화되어가는 미묘한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믿기로는 해체주의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가 종말론적 지평 위에 서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해체주의 이후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신은 근본주의적 폐쇄성을 띄는 닫힌 미래를 제시하는 '계시의 신'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신'이라고 본다(그래서 그의 대표작의 이름이 'The God who may be'이다).
이 같은 종말론적 왕국은 이것이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순환적 '사건', 종국적으로 회귀하는 동일한 기원의 사건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 너머"에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왕국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신이 지금까지 상상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종말론적 기대에는 윤리적 급박함이 있다. 만약 "가능한 도래"가 실제로 예측하지 못한 놀라움으로 밤중의 도둑처럼 온다면, 그것은 가장 약한 자의 얼굴을 통해 올 것이다. 즉 "이들 중 가장 작은 것들"의 울부짖음으로,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과부와 고아, 고뇌에 가득 찬 자, 주린 자의 얼굴을 통해 올 것이다. 이 같은 윤리적 요청에 대답하려면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이방인, 신, 괴물> p412
계몽주의 시대의 인식론의 특징은 실재/진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실재/진리와 분명히 접촉할 수 있고 오해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러한 자신만만한 '실재론'은 포스트모던시대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붕괴를 이끈 일련의 흐름을 "해체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해체주의가 계몽주의 시대의 오만과 독단을 해체하려다 진리 자체를 해체해버린 후, 이제 더이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해체주의 이후 세계는 인식론적 무지와 윤리적 모호함에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최근 학문의 여러 영역에서 포스트모던의 극단을 찍고 다시 중간지대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가령, '비판적 실재론').
그러나 비록 커니가 판별의 해석학을 강조하고 선악은 윤리적 기준으로 다루어야지 미학적으로 모호하게 악의 심각성을 흐리면 안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의 인식론의 위치는 분명 비판적 실재론자보다는 해체주의자에 더 가깝다. 그는 해체주의로 분류되는 학자군 안에서 약간의 중도회귀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 정도로 볼 수 있을거 같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커니는 해체주의자가 아니라는 반론도 가능할지 모르나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디테일은 식별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수록 큰 차이도 점점 더 작아보이는 법이다. 나의 신학적 스탠스에서 볼 때 커니와 여타 더 강고한 해체주의자들(데리다, 카푸토, 리오타르 등) 간의 차이는 새누리당에서 보기에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마땅한 예를 못 찾았을 뿐이다. 새누리당... 나는 그 정도의 꼴통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리처드 커니를 알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해체주의자들 안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해준 신선한 만남이었다. 해체주의 안에 보여지는 다양성들을 보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단순화된 이해도 어느 정도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식론에 있어서 해체주의와 같은 극단적 관점주의가 나의 견해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그래도 온건한 실재론자로서 이러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책을 통한 소통을 시도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듯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타자성의 철학'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졌다. 이제 다음은... 레비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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