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의 어느날, 아내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임신테스트를 해보았는데 선명한 두 줄이 나왔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잠시동안 멍했습니다.

결혼 5년만에 드디어 생긴 아기, 저희 부부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태명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창의성이 없는지라 이름 같은 것 정하는 일을 참 힘들어합니다.

간사하면서 제일 기피했던 일 중 하나가 수련회 주제어나 문구 등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태명을 짓는 것도 억지로 지으려고 했다면 참 스트레스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하나의 이름이 떠오른 후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임신소식을 듣고 나서 처음 드렸던 기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혼 5년만에, 서른여섯 나이에 첫 아기가 생기자 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아내 뱃속에 아직 콩알보다도 더 작게 자리잡고 있는 그 생명이 참으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고맙고 아기에게도 고맙고.. 그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세상에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부모를 만나면 참 꼴불견이라 생각해왔는데 이제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는구나. 잉태가 불러일으키는 감동과 행복이 이 정도인데 그렇게 열 달을 품고 낳아서 애지중지 키웠으니,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게 살면 세상에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사람 되는 건 쉬운 일이겠구나. 자칫하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부부에게 아기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늦게 생긴 아기이다 보니 저희에게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행여나 저와 아내가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부모로 살지 않게 해주시고, 세상 사람 모두가 이 아기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고 그렇게 대하는 부부로 살게 해주세요.”

이것이 임신소식을 듣고 나서 제가 드린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저는 그 깨달음이 하나님께서 이 아기를 통해 우리 가정에 주신 메시지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태명을 소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세상이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늘상 만나오던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들이 그들 부모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는지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귀하게 보였습니다.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그가 누군가의 얼마나 소중한 아들딸인가 하는 것이 떠오르면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참 아팠습니다. 소중이가 일깨워준 깨달음으로 인해 더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얼마전 세월호 백일집회에 갔었는데 무대 위에 선 유가족들의 눈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분들의 눈에 비친 슬픔이 너무나 깊었습니다.

저는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 분들이 잃은 것은...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키워낸 그 분들의 소중이일테니까요.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세월호특별법이 고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단식하는 유가족 분들이 너무나 염려스럽습니다.

사람들은 무뎌져가고 잊어갑니다. 잊지 말자 다짐했지만 저 역시 조금씩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유가족들께 참 죄송합니다.

이제 그분들을 불편해하고 귀찮아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심지어 욕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최근 유가족을 욕하는 댓글이 급격히 늘었다 합니다.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나 믿어지지 않지만,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어디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이 저에겐 참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10년을 기독교전임사역자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이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될 저에게 이 문제는 나에게 이 직업이 앞으로도 계속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인가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교회가 왜 세월호를 외면해서는 안되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책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의 책 <교회됨> (원제: Community of Character)의 후반부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의 낙태반대논증은 독특하지만 제가 지금껏 들어본 것 중 가장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논증입니다.

그의 주장을 잘 드러내주는 글 세 부분을 인용합니다.

 

공동체가 자녀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공동체 그 자체 및 구성원들의 자신감의 표시이다. 자녀란 역경과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미래에 대한 공동체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 인생은 고달픈 것이지만, 살아낼 만하다. 솔직히, 인생이란 남들에게 그렇게 살아보라고 권할 만큼의 열정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녀를 세상에 받아들이고 환영하기를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녀를 하나님의 창조와 그 분께서 세상을 어둠의 권세에 버려두려하지 않으신다는 신실함의 표지로 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낙태금지는 새 생명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적극적 위탁의 소극적 표현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좀 더 지혜로워졌으면 한다. 낙태반대론을 제시할 때, 그 안에 내재된 기독교의 관점 즉 출산의 환영이라는 요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에너지를 태아가 인격체인가 아닌가에 집중하기보다 자녀가 왜 소망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뜬금없이 낙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낙태반대는 기독교가 가장 열렬히 붙들고 있는 윤리적 이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낙태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하우어워스의 논증이 드러내보여주고 있는 낙태반대의 핵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는 낙태하는 이들을 정죄하고 저주하기 위해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낙태반대가 자리하고 있는 더 큰 그림에는 출산을 환영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출산은 이처럼 죄와 고통이 많은 세상으로 감히새로운 생명을 초청하고 소환하는 담대한 행위입니다.

이 세상이 자녀들에게 줄 선물일만큼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자녀들을 이 세상으로 초대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교회와 함께 이 세상을 자녀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가겠다는 결단이 담겨 있는 초청입니다.

기독교의 낙태반대는 그러한 큰 그림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이 인간의 선택에 의해 죽임당하는 것을 반대하며, 그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교회는, 그 생명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낙태반대는 무책임하며 바리새적인 것이 될 뿐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안전한 세상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은 참사의 원인이 명명백백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 묻고 싶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월호를 잊는다면, 세월호의 진실이 묻히는 것을 보고도 유가족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한다면, 세월호 이후 교회는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낙태를 반대할 수 있습니까,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출산을 장려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세월호 이후의 교회는 낙태반대와 출산장려를 외칠 어떠한 도덕적 권위와 명분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낙태반대를 외칠 때 주장해온 생명존중의 정신이 이 세월호 국면에서도 반드시 보여져야 할 것입니다.

 

소중이는 이제 20주를 지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세월호를 잊지 않을 겁니다. 소중이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소중이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다른 누구보다 이 땅의 교회들을,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Posted by S. J. Hong
,

요즘 세월호 국면을 보고 있노라면 욥기가 떠오른다.
욥기의 대부분은 '억울하다' 항변하는 욥과 '그 입 다물라'는 친구들 사이의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에서 욥기는 가장 읽기 어려운 책 중 하나다. 끝없이 반복되는 욥과 친구들의 입씨름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독자를 더 지치게 만드는 부분은 욥의 발언일 것이다.
'욥이 옳았고 친구들이 틀렸다'라는 정답을 미리 투영하여 읽지 말고 이들의 대화 자체에만 집중하여 읽어보라. 그러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번갈아 등장하여 다양한 성향과 논리를 보여주는 친구들의 발언과 달리, 친구들이 뭐라 말하든지 아랑곳않고 끝없이 외치는 욥의 한맺힌 절규를 듣고 있노라면,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 적당히 좀 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처입은 자들의 ‘한 두 번의’ 절규는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하지만, 상처입은 자들의 ‘끝없이 반복되는’ 절규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욥은 그렇게 거센 반대의 목소리에 직면해야 했고, 철저히 고립되고 외면당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시대의 욥은 국회 앞에 있고 광화문 광장에 앉아있다. 그들은 곡기를 끊고 하나둘 쓰러져가며 절규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향한 최소한의 도리는 그들이 왜 죽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진상규명하라! 특별법 제정하라!”
그런데 우리에겐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이 100일이 그렇게도 길었나보다. 
‘언제까지 세월호이야기만 할거냐. 지친다.’는 정서에 힘입어 “적당히 하고 그 입 다물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래, 그렇게 욥의 세 친구들에게 조금씩 힘이 실려가나보다. 
이러한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설 것인가. 
욥의 곁에서 함께 울며 욥의 외침에 힘을 실어줄 것인가. 아니면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뜻 운운하며 욥에게 가만히 있으라 할 것인가.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7)

욥은 슬픔과 분노 속에서 하나님에게 수많은 의문과 원망을 토로했지만, 하나님은 욥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옳았다” 하셨다. 
반면 욥의 친구들이 쏟아낸 수많은 하나님 찬양과 종교적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했다”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셨다' 말씀하셨다.

욥기의 결말은 세월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서슬퍼런 외침이다.
억울한 고난을 당하여 절규하는 한맺힌 이들의 입을 막지마라!
그들의 입을 막는데에 ‘하나님’을 들먹이지 말아라!
너희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드러날 때 너희는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려는가...

Posted by S. J. Hong
,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
 기독교인은 노란 리본달기에 동참하면 안된다는 글이 SNS를 통해서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레이디가가, 한반도전쟁예언, 차별금지법 등등 때마다 비슷한 성격의 글이 어김없이 날아왔습니다. 처음 받았을 때는 모르는 이가 날린 스팸성 글이었으니 그들의 무지와 몰상식을 비난하는 마음만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인들에게 받고 나니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 분들의 진실한 삶과 신앙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후로 저는 그런 문자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에는 속상하고 상심되지만, 그 안에 있는 그 분들의 진심을 읽어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에게 가능한 한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신실하고 순수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런 유의 글을 퍼나를만큼 쉽게 영향을 받는 이유는, 그 분들의 뜨거운 신앙심에 비해서 기독교신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을 이해하는 기독교세계관의 자리는 비어있거나 또는 조잡하고 반성경적인 이원론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고 기독지성운동의 책임입니다.
그 글을 퍼나르는 분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그로 인해 그 분들은 상처받고 그 반감으로 더욱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에 완고히 머무르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떠도는 노란 리본 반대 글 몇 개를 읽어보니 크게 두 가지 요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1. 노란 리본은 무속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사용하면 안된다. 노란 리본 사용은 우상숭배이고 사탄에게 미혹되는 것이다.
2. 사탄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전 국민을 우울증에 빠지게 하려고 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슬픔에서 벗어나야 한다.


2번의 경우, 많은 분들이 좋은 답을 주셨으므로 보탤 말은 많이 없을 거 같습니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의 문제는 감수성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적 도덕적 불감증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https://www.facebook.com/seekerjh/posts/702196109823843?stream_ref=10
고난받는 이와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며 인간의 도리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막는 것이 폭력이며, 그렇게 억눌러진 슬픔이 우리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총신대 김희석 교수님의 글이 좋은 답변이 될 것입니다. 
https://www.facebook.com/heesuk.kim/posts/641475549260160?fref=nf


1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노란 리본이 무속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전쟁에 나간 군인이나 실종자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나무에 매달았던 노란 리본에서 유래한 것임은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애도’를 상징하는 리본을 결합하여, 실종자 무사귀환과 사망자에 대한 애도를 함께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들이 무속적이라 말하는 나비 역시 기독교적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청어람 박현철 연구원의 글 링크합니다.

http://bokklers.com/index.php?mid=all&category=2428&document_srl=10916


“노란 리본은 나비이며, 무속에서 노란 나비는 저승 가는 영혼을 상징하므로 노란 리본은 무속적이고 우상숭배적”이라는 조잡한 논리전개에 전혀 동의가 안 되지만, 만약 백번 양보하여 공교롭게도 노란 리본에 그런 무속적 의미 ‘또한’ 담을 수 있다고 해봅시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노란 리본을 희망과 애도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없나요? 

당연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세월호 관련하여 노란 리본을 다는 이들에게는 노란 리본이라는 상징은 ‘실종자 무사귀환에 대한 염원과 사망자 애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란 리본으로 희망과 애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적인 의도’라면, 우리에게 노란 리본 달기는 우리의 의도에 해당하는 표현과 실천이 됩니다.


한국 개신교의 문화 이해는 아직도 매우 협소하고 천박합니다.
최근 인기를 끈 개신교 기반의 문화해석운동이 박성업 수준의 극히 해로운 음모론인 걸 보면 이건 제자리걸음이라기보다 오히려 퇴보에 가깝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백워드마스킹 논란에서 세월은 십수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유명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속에서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상징을 찾아내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요즘의 대중문화강의에서 세월이 무색한 한결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가려진 이교적, 사탄적 전략에 의해 우리도 모르게 해로운 것에 휘말리거나 무의식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포비아(공포증)에 호소합니다.
이러한 주장에서는 ‘인지가능하고,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것의 영향보다 ‘인지하지 못한, 비의도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의 영향이 더 중요시됩니다.‘몰랐지 알고보면 이래. 큰일날뻔했지?’로 요약되는 이런 패턴은 언제나 쉽고 자극적이며 위기감을 유발하여 대중들에게 잘 먹힙니다.이번 노란 리본 반대에서도 그런 정서가 깔려 있습니다. 노란 리본을 달아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도 모르는 무속적 활동’에 참여하게 하는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사탄이 그런 깨알같은 전략을 쓰고 있다면 비웃음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란 리본을 다는 우리의 의식적 의도가 희망과 애도의 표현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노란 리본을 그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탄의 권세와 영향력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난 명백히 사탄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생명이 달린 배를 운항하면서 노후선박운영, 객실개조, 과적운항 등으로 이윤을 짜내려 했던 해운사 어른들의 탐욕, 승객들을 버려두고 먼저 도망친 선원 어른들의 무책임함,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참극 앞에서 책임전가하기에 바쁜 정부 어른들의 비겁함, 유가족의 아픔을 비웃으며 키보드 앞에서 장난질 하는 일베 어른과 어린이들의 사악함... 이런 것들이야말로 명백히 사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회개해야 할 것은, (음모론이 말하는 사탄적인 것의 무의식적, 비의도적 영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탐욕과 무책임함, 비겁함과 사악함이 이러한 사탄적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슬퍼하고 뉘우치며 분노하고 꾸짖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더 이상 이런 세상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요. 노란 리본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사탄과 맞닥뜨리고 있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전선입니다.

Posted by S. J. Hong
,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뻐해야 할 날과 "인간"으로서 가장 슬퍼해야 할 날이 만났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어찌할 것인가?
고뇌에 찬 아침이다.

그러나.
생때같이 푸른 우리 아이들이 며칠을 추운 바다에 갇혀 있다가 결국 차디찬 시신으로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는 이 서러운 아침에...
애써 기뻐하려 하지 말자.
"부활절"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에게 기쁨을 강요하지도 말자.

자식을 잃은 부모가 며칠 후 생일을 맞았다 하자. 
그 부모가 "오늘은 내 생일이니 어서 잔치상을 내오라. 자녀들아. 모두 기뻐하라"하겠는가?
자신의 생일은 안중에도 없이, 숨진 자식을 부둥켜 안고 아파하고 통곡하지 않겠는가?
인간 부모도 그러할진대... 
지금 세월호를 부둥켜 안고 우시는 예수님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절기를 따라서 애써 작위적인 기쁨을 만들어내지 말자.
그런 '비인간화된' 기쁨으로 예수님을 더 아프고 민망하게 만들지 말자.
우리 제발 그러지 말자.

슬픈 부활절은 형용모순이 아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삶, 십자가, 부활 이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은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 실존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체휼과 동일시였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아파하는 이 날에 우리도 함께 아파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부활절을 가장 부활절답게 보내는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