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IVP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약학자가 톰 라이트라면,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윤리학자는 스탠리 하우어워스다. 
이렇게 단언하기엔 하우어워스의 책을 그리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잘 이해한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시작으로 읽게 된 몇 권의 책들과, 신대원에서 그를 간략히 다룬 윤리학 수업을 들은 것 만으로도 하우어워스에게 매료되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우어워스의 사상에 매료된 것이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나의 아이>의 출간을 통해 하우어워스라는 사람 자체를 알아갈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이 책은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회고록 형식의 책이다.
양극성 장애를 앓았던 아내 앤과의 결혼생활, 그 속에서 피어난 아들과의 우정, 앤과의 이혼, 폴라와의 재혼, 앤의 비극적인 죽음 등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삶의 이야기를 그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예수성공 불신실패"의 단순화된 인생이해를 신자들에게 주입하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 도식화된 구도에 들어맞지 않는 수많은 복잡다단한 인생들이 '믿음없는 삶', '실패한 삶'으로 규정되어 비난받거나 교화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신자들 중에 오히려 인생사의 복잡미묘함을 깨닫는 능력이나 타인의 삶의 무게를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은 것을 종종 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신학자라 불리는 이가 살아온, 고통과 슬픔과 기쁨과 은혜가 촘촘히 엮여 형성된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익은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좁은 안목이 넓어지기를 바래본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직접 한글로 책을 써낸 듯 느껴질 정도의 유려한 번역은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책의 성격상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부정확하고 어색한 번역이 방해하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인데, 역자는 그 일을 정말 완벽하게 해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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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의 어느날, 아내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임신테스트를 해보았는데 선명한 두 줄이 나왔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잠시동안 멍했습니다.

결혼 5년만에 드디어 생긴 아기, 저희 부부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태명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창의성이 없는지라 이름 같은 것 정하는 일을 참 힘들어합니다.

간사하면서 제일 기피했던 일 중 하나가 수련회 주제어나 문구 등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태명을 짓는 것도 억지로 지으려고 했다면 참 스트레스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하나의 이름이 떠오른 후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임신소식을 듣고 나서 처음 드렸던 기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혼 5년만에, 서른여섯 나이에 첫 아기가 생기자 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아내 뱃속에 아직 콩알보다도 더 작게 자리잡고 있는 그 생명이 참으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고맙고 아기에게도 고맙고.. 그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세상에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부모를 만나면 참 꼴불견이라 생각해왔는데 이제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는구나. 잉태가 불러일으키는 감동과 행복이 이 정도인데 그렇게 열 달을 품고 낳아서 애지중지 키웠으니,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게 살면 세상에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사람 되는 건 쉬운 일이겠구나. 자칫하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부부에게 아기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늦게 생긴 아기이다 보니 저희에게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행여나 저와 아내가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부모로 살지 않게 해주시고, 세상 사람 모두가 이 아기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고 그렇게 대하는 부부로 살게 해주세요.”

이것이 임신소식을 듣고 나서 제가 드린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저는 그 깨달음이 하나님께서 이 아기를 통해 우리 가정에 주신 메시지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태명을 소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세상이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늘상 만나오던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들이 그들 부모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는지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귀하게 보였습니다.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그가 누군가의 얼마나 소중한 아들딸인가 하는 것이 떠오르면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참 아팠습니다. 소중이가 일깨워준 깨달음으로 인해 더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얼마전 세월호 백일집회에 갔었는데 무대 위에 선 유가족들의 눈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분들의 눈에 비친 슬픔이 너무나 깊었습니다.

저는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 분들이 잃은 것은...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키워낸 그 분들의 소중이일테니까요.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세월호특별법이 고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단식하는 유가족 분들이 너무나 염려스럽습니다.

사람들은 무뎌져가고 잊어갑니다. 잊지 말자 다짐했지만 저 역시 조금씩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유가족들께 참 죄송합니다.

이제 그분들을 불편해하고 귀찮아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심지어 욕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최근 유가족을 욕하는 댓글이 급격히 늘었다 합니다.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나 믿어지지 않지만,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어디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이 저에겐 참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10년을 기독교전임사역자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이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될 저에게 이 문제는 나에게 이 직업이 앞으로도 계속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인가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교회가 왜 세월호를 외면해서는 안되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책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의 책 <교회됨> (원제: Community of Character)의 후반부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의 낙태반대논증은 독특하지만 제가 지금껏 들어본 것 중 가장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논증입니다.

그의 주장을 잘 드러내주는 글 세 부분을 인용합니다.

 

공동체가 자녀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공동체 그 자체 및 구성원들의 자신감의 표시이다. 자녀란 역경과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미래에 대한 공동체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 인생은 고달픈 것이지만, 살아낼 만하다. 솔직히, 인생이란 남들에게 그렇게 살아보라고 권할 만큼의 열정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녀를 세상에 받아들이고 환영하기를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녀를 하나님의 창조와 그 분께서 세상을 어둠의 권세에 버려두려하지 않으신다는 신실함의 표지로 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낙태금지는 새 생명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적극적 위탁의 소극적 표현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좀 더 지혜로워졌으면 한다. 낙태반대론을 제시할 때, 그 안에 내재된 기독교의 관점 즉 출산의 환영이라는 요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에너지를 태아가 인격체인가 아닌가에 집중하기보다 자녀가 왜 소망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뜬금없이 낙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낙태반대는 기독교가 가장 열렬히 붙들고 있는 윤리적 이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낙태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하우어워스의 논증이 드러내보여주고 있는 낙태반대의 핵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는 낙태하는 이들을 정죄하고 저주하기 위해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낙태반대가 자리하고 있는 더 큰 그림에는 출산을 환영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출산은 이처럼 죄와 고통이 많은 세상으로 감히새로운 생명을 초청하고 소환하는 담대한 행위입니다.

이 세상이 자녀들에게 줄 선물일만큼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자녀들을 이 세상으로 초대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교회와 함께 이 세상을 자녀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가겠다는 결단이 담겨 있는 초청입니다.

기독교의 낙태반대는 그러한 큰 그림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이 인간의 선택에 의해 죽임당하는 것을 반대하며, 그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교회는, 그 생명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낙태반대는 무책임하며 바리새적인 것이 될 뿐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안전한 세상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은 참사의 원인이 명명백백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 묻고 싶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월호를 잊는다면, 세월호의 진실이 묻히는 것을 보고도 유가족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한다면, 세월호 이후 교회는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낙태를 반대할 수 있습니까,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출산을 장려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세월호 이후의 교회는 낙태반대와 출산장려를 외칠 어떠한 도덕적 권위와 명분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낙태반대를 외칠 때 주장해온 생명존중의 정신이 이 세월호 국면에서도 반드시 보여져야 할 것입니다.

 

소중이는 이제 20주를 지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세월호를 잊지 않을 겁니다. 소중이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소중이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다른 누구보다 이 땅의 교회들을,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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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결혼만 생각할 따름이다. 혹은 우리가 먼저 적합한 사람과 결혼한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은 변질될 수 있다. 결혼한 이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사람일 수는 없다. 우리가 결혼하기로 선택한 그 타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됨> 중에서.

 

몇년 전,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풀러신학교 강연을 통해 심한 조울증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살아야 했던 고통의 세월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의 저서 <교회됨>을 읽다가 발견한 이 구절들 앞에서 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교회됨>은 1981년에 쓰여진 책이다. 그는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썼고 그 이후 오랜 세월을 고통속에 인내하며 자신이 말했던 결혼의 의미대로 살았다. (나는 그가 아내의 죽음 얼마 전에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했던 별거가 그가 결혼생활을 신실하게 완수해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면 그리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1년 '타임'지의 선택대로 그를 '최고의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학문적 성과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신학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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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사회전략이다” 또는 “교회가 사회윤리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에서 기독교윤리를 추출해내어 사회정책이나 사회윤리에 이식하여 법제화하거나 제도화하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서의 윤리는 사회를 위한 보편윤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를 위한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 가령, 윌리몬과의 공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하우어워스는 주기도문의 주어가 ‘우리’라는 사실에서 두 가지 통찰을 이끌어낸다. 첫째는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우리’라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은 개인경건을 위한 기도문이 아니고 공동체적 삶을 위한 기도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주기도문의 윤리적 함의대로 살아야 할 책임은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는 것 아니다. 교회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그것대로 살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 된다. 역시 윌리몬과 공저한 <십계명>을 이루는 중심사상도 동일하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회의 법이나 정책의 근거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에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교회는 세상과 차별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이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윤리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윤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기독교윤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가?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기독교윤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것은 세상에 복음의 진정성과 기독교윤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한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교회가 보여줄 때, 세상이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라 볼 수 있다. 가령, 교회가 평화을 이루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러한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폭력성을 깨닫게 된다. 교회가 인간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비인격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단지 기독교윤리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윤리로 자신의 존재가 형성된 사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우어워스는 이것을 ‘덕(virtue)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하우어워스에게 중요한 윤리적 의제는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덕의 윤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narrative)이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차적으로 성서의 내러티브가 중요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성서의 내러티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그러한 사람을 형성해낸다.

이상과 같이 하우어워스의 “교회가 사회전략이다”라는 주장의 의미를 약술해보았다. 이야기, 덕과 인격, 공동체를 강조하는 하우어워스의 접근법은 포스트모던시대에 매우 적합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모던시대에는 객관성을 중시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검증을 중시했으나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포스트모던시대에는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독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메타내러티브는 죽었다’는 리오타르의 선언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해체주의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거대담론은 배척하고 지역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을 중시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선포와 논쟁, 변증 등의 근대적인 방식보다는 이야기 들려주기, 삶으로 보여주기 등의 방식으로 세상에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우어워스의 방법은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시대에 큰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우어워스가 그것이 포스트모던시대에 통할만한 전략이기 때문에 이러한 윤리적 접근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교회가 묵묵히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질 때에 세상이 교회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삶보다 말이 앞서고, 결국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인들을 통해 교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심지어 사회적 지탄까지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맥락 속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는 의제를 가지고 있는 하우어워스의 윤리적 전략은 한국교회가 꼭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우어워스의 주장이 지나치게 교회중심적이고 기독교윤리를 교회내부의 윤리로만 가두어놓는 분파주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매우 일리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독교 윤리가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막스 스택하우스이다. 나는 이 양 진영의 주장 중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윤리는 하우어워스의 주장대로 일차적으로 교회를 향해 주신 것임이 분명하고 또한 동시에 스택하우스의 주장처럼 사회적 에토스를 형성하여 세상을 더욱 윤리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에 따라 기독교윤리가 교회의 윤리임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기독교윤리에 사회적, 공적 가치를 형성해내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도덕적 해이와 스캔들로 한국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이러한 맥락에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함으로 다시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을 일깨우는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야말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윤리학자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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