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파토스'를 강조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파토스'가 설교자 안에 있는 하나님과 복음을 향한 불붙는 열정을 의미한다면, 모든 설교자에게 파토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에 나도 백퍼센트 동의한다.
하지만 설교를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많은 경우, 파토스는 '설교자의 열정이 회중들에게 느껴지도록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파토스가 강조되어지는 맥락에서 그 의미를 들여다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렇게 딜리버리 스킬로 '파토스'를 배운 많은 이들이 그 놈의 '파토스'를 회중에게 보여주겠다고 설교 중에 인위적으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예언자적 설교를 하겠다고 애꿎은 회중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런 파토스? 글쎄... 잘 모르겠다.^^;
"... 나는 우리가 흔히 품고 있는 그런 선지자적 설교의 개념을 ...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선지자적 설교'로 꼽히는 데스몬드 투투와 다니엘 베리간, 조나단 코졸 등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거기에는 분개의 힘은 있지만 맹렬한 분노는 찾을 수 없고 희망과 연민에 가득찬 채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단순히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고만 우리가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청중에게 분노를 퍼붓지 않고 그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조용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터 브루그만,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p114
브루그만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후련하다. 그렇다. 호통친다고 선지자적 설교가 아니다. 물론 그가 파토스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논지를 좀 더 확장하면 같은 원리를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설교자의 파토스는 톤의 고저와 음성, 제스쳐 등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 안에 있는 복음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파토스라면, 그것은 조용한 목소리로도 충분히 강력하게 전달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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