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사회전략이다” 또는 “교회가 사회윤리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에서 기독교윤리를 추출해내어 사회정책이나 사회윤리에 이식하여 법제화하거나 제도화하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서의 윤리는 사회를 위한 보편윤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를 위한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 가령, 윌리몬과의 공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하우어워스는 주기도문의 주어가 ‘우리’라는 사실에서 두 가지 통찰을 이끌어낸다. 첫째는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우리’라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은 개인경건을 위한 기도문이 아니고 공동체적 삶을 위한 기도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주기도문의 윤리적 함의대로 살아야 할 책임은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는 것 아니다. 교회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그것대로 살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 된다. 역시 윌리몬과 공저한 <십계명>을 이루는 중심사상도 동일하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회의 법이나 정책의 근거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에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교회는 세상과 차별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이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윤리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윤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기독교윤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가?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기독교윤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것은 세상에 복음의 진정성과 기독교윤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한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교회가 보여줄 때, 세상이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라 볼 수 있다. 가령, 교회가 평화을 이루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러한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폭력성을 깨닫게 된다. 교회가 인간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비인격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단지 기독교윤리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윤리로 자신의 존재가 형성된 사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우어워스는 이것을 ‘덕(virtue)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하우어워스에게 중요한 윤리적 의제는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덕의 윤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narrative)이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차적으로 성서의 내러티브가 중요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성서의 내러티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그러한 사람을 형성해낸다.

이상과 같이 하우어워스의 “교회가 사회전략이다”라는 주장의 의미를 약술해보았다. 이야기, 덕과 인격, 공동체를 강조하는 하우어워스의 접근법은 포스트모던시대에 매우 적합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모던시대에는 객관성을 중시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검증을 중시했으나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포스트모던시대에는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독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메타내러티브는 죽었다’는 리오타르의 선언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해체주의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거대담론은 배척하고 지역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을 중시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선포와 논쟁, 변증 등의 근대적인 방식보다는 이야기 들려주기, 삶으로 보여주기 등의 방식으로 세상에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우어워스의 방법은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시대에 큰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우어워스가 그것이 포스트모던시대에 통할만한 전략이기 때문에 이러한 윤리적 접근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교회가 묵묵히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질 때에 세상이 교회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삶보다 말이 앞서고, 결국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인들을 통해 교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심지어 사회적 지탄까지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맥락 속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는 의제를 가지고 있는 하우어워스의 윤리적 전략은 한국교회가 꼭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우어워스의 주장이 지나치게 교회중심적이고 기독교윤리를 교회내부의 윤리로만 가두어놓는 분파주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매우 일리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독교 윤리가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막스 스택하우스이다. 나는 이 양 진영의 주장 중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윤리는 하우어워스의 주장대로 일차적으로 교회를 향해 주신 것임이 분명하고 또한 동시에 스택하우스의 주장처럼 사회적 에토스를 형성하여 세상을 더욱 윤리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에 따라 기독교윤리가 교회의 윤리임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기독교윤리에 사회적, 공적 가치를 형성해내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도덕적 해이와 스캔들로 한국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이러한 맥락에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함으로 다시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을 일깨우는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야말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윤리학자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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