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파토스'를 강조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파토스'가 설교자 안에 있는 하나님과 복음을 향한 불붙는 열정을 의미한다면, 모든 설교자에게 파토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에 나도 백퍼센트 동의한다. 
하지만 설교를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많은 경우, 파토스는 '설교자의 열정이 회중들에게 느껴지도록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파토스가 강조되어지는 맥락에서 그 의미를 들여다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렇게 딜리버리 스킬로 '파토스'를 배운 많은 이들이 그 놈의 '파토스'를 회중에게 보여주겠다고 설교 중에 인위적으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예언자적 설교를 하겠다고 애꿎은 회중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런 파토스? 글쎄... 잘 모르겠다.^^;

"... 나는 우리가 흔히 품고 있는 그런 선지자적 설교의 개념을 ...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선지자적 설교'로 꼽히는 데스몬드 투투와 다니엘 베리간, 조나단 코졸 등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거기에는 분개의 힘은 있지만 맹렬한 분노는 찾을 수 없고 희망과 연민에 가득찬 채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단순히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고만 우리가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청중에게 분노를 퍼붓지 않고 그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조용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터 브루그만,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p114

브루그만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후련하다. 그렇다. 호통친다고 선지자적 설교가 아니다. 물론 그가 파토스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논지를 좀 더 확장하면 같은 원리를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설교자의 파토스는 톤의 고저와 음성, 제스쳐 등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 안에 있는 복음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파토스라면, 그것은 조용한 목소리로도 충분히 강력하게 전달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Posted by S. J. Hong
,

"우리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결혼만 생각할 따름이다. 혹은 우리가 먼저 적합한 사람과 결혼한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은 변질될 수 있다. 결혼한 이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사람일 수는 없다. 우리가 결혼하기로 선택한 그 타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됨> 중에서.

 

몇년 전,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풀러신학교 강연을 통해 심한 조울증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살아야 했던 고통의 세월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의 저서 <교회됨>을 읽다가 발견한 이 구절들 앞에서 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교회됨>은 1981년에 쓰여진 책이다. 그는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썼고 그 이후 오랜 세월을 고통속에 인내하며 자신이 말했던 결혼의 의미대로 살았다. (나는 그가 아내의 죽음 얼마 전에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했던 별거가 그가 결혼생활을 신실하게 완수해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면 그리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1년 '타임'지의 선택대로 그를 '최고의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학문적 성과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신학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

  롤프 렌토르프(Rolf Rendtorff)의 『구약정경신학』은 『The Canonical Hebrew Bible : A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의 2부를 번역하여 출간한 책이다. 1부는 구약성서를 권별 흐름에 따라 정리해 놓았으며 2부는 주제별로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작품처럼 읽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원래 한 책으로 묶여있던 것이 저자의 의도이므로 이 책도 1부와의 연관성 속에서 읽을 때에 비로소 저자의 신학과 구약연구방법론의 독특한 맛과 멋을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약학 개관 수업을 통해 본서의 1, 2부를 함께 읽으며 거장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유익이었다.

먼저, 렌토르프가 취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론을 살펴보자. 렌토르프는 성서의 최종형태로서의 본문이 일차적 관심사와 연구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지난 세월을 지배해 왔던 성서해석 방법론인 ‘역사비평’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이 있다. 성서해석사에 있어서 역사비평의 출현은 성서연구에 큰 기여를 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성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배달되어온 책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상에서 형성되어온 책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과 그것이 자리했던 역사와의 관계들을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비평을 통해서 성서해석은 이전에 없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성서를 보다 풍성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해석사에 있어서 역사비평이 했던 독특한 기여였다. 이러한 역사비평은 이성을 무한히 신뢰하며 객관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시대에 매우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져 근대의 성서해석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곧 역사비평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성서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대한 지나친 의심으로 인해서 본문을 심하게 자르고 재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시대의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결국 역사비평의 관심사는 성서본문(text)보다 본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상황(context)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비평은 당연히 ‘의심의 해석학’을 추구하며 그것은 본문의 해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성서 뒤에 숨겨져 있는 ‘진짜’ 역사를 밝혀내야 한다는 역사비평의 전제는 결국 성서를 최종본문의 형태로 완성시킨 편집자의 의도를 불순한 것으로 보고 편집이전의 ‘순수한’ 형태를 추적하고 본문을 편집이전의 요소들로 분해하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은 우리가 본문 너머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여도 우리가 반드시 진짜 역사를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진짜 역사를 발견했다 해도, - 물론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역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 우리의 최종적 관심사는 역사보다는 본문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문의 역사적 상황(context)을 주신 것이 아니라 본문(text) 자체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성서를 오늘날 주어진 최종형태의 본문으로 존중하게 하며, 또한 그 최종 형태가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우선적으로 묻게 한다. 여기에서 역사비평이 주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들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역사비평과 구분하여 '정경비평'이라고 한다. 롤프 렌토르프는 정경비평의 초석을 놓았다 할 수 있는 구약신학의 거장 폰 라트의 제자로서, 정경비평의 방법론을 계승하고 더 한층 발전시키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라고 한다.

나는 본 강의를 수강하기 전까지는 ‘정경비평’이나 ‘렌토르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렌토르프의 주장은 나에게 전혀 낮선 주장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내 관심사 중의 하나인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도 최근에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렌토르프의 정경비평적 방법론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의 톰 라이트(N. T. Wright)의 방법론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는 역사비평을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복음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전적으로 부정되고 완전히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재구성하는데까지 나아갔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버트 펑크, 도미니크 크로산, 마커스 보그 등이 활동했던 ‘예수 세미나’이다.

톰 라이트의 예수 세미나에 대한 비판은 매우 예리하며, 렌토르프의 문제의식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극단적인 의심의 해석학은 결국 성서본문에 대한 철저한 해체를 낳게 되고 그 이후의 재구성에 있어서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과 선호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객관적 역사를 복원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은 자신이 원하는 역사를 창조하여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는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이러한 극단적 역사비평을 적용한 학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상을 재구성해내었음을 성공적으로 보여줬다.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여 톰 라이트는 기존의 역사비평의 방법론을 적용하되 복음서의 최종형태를 존중하면서 연구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방법론의 철학적 전제를 ‘비판적 실재론’이라 부른다. 그리고 성서를 올바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의심의 해석학이 아닌 ‘사랑의 해석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사랑의 해석학’이란 성서 텍스트의 최종형태에 대한 존중와 신뢰를 가지고 성서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연구는 성공적으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으며 복음서 연구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그런데 이 책 『구약정경신학』을 통해서 구약학계에서 톰 라이트와 비슷한 문제의식과 신학적 접근법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렌토르프를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또한 그가 구약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매우 기뻤다. 이와 같이 구약학계와 신약학계 모두에서 역사비평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결국, 성서해석의 역사를 돌아보면, 최종본문이 존중되었던 역사비평 이전의 시대(전근대), 그리고 역사비평이 지배해 오던 근대의 시대를 지나 다시 최종본문이 강조되는 시대(탈근대)가 부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근대 이전의 성서문자주의 시대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성서의 최종형태를 존중하고 전체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동안 역사비평을 통해 축적되어온 수많은 통찰들이 정경비평에 기여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경비평에 입각한 성서연구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본서와 같이 성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들을 밝혀내고 서술하는 신학적 작업일 것이다. 역사비평에 입각해서도 구약신학을 체계적으로 세우는 작업이 물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비평의 관점에서는 성서의 최종본문에 대한 편집자의 정치적 의도 등을 문제 삼으며, 성서 본문들이 상반되는 관점을 가진 다양한 출처들에서 나와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 전체의 신학적 맥을 잡는 시도를 할 때에는 역사비평의 방식은 성서전체의 일관성과 응집력이 강조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어렵다는 약점을 가질 것이다.

그에 반해 렌토르프는 『구약정경신학』에서 구약성서 전체를 최종형태로 존중하면서 구약의 여러 본문들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주요주제들을 개관하고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구약성서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쓰여진 책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계시를 통일성있게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이 명백히 나타나는 매우 놀라운 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막 신학을 시작하는 초보신학도로서 여러 구약학자들을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방법론을 놓고 추론해 보자면 구약성서에 나타난 계시의 통일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학자가 이 렌토르프가 아닐까 생각된다.

렌토르프는 구약성서를 통일된 작품으로 우리에게 열어보여 준다. 예컨대, 구약이 계시적 통일성을 이루는데 모세오경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8개의 주제들 중에서 창조, 언약과 선택, 족장, 땅, 출애굽, 토라, 제의, 모세라는 8개의 주제가 모세오경에서 출현하고 자리를 잡는다. 그 후에는 - 오경에 언급되지 않은 다윗과 시온이라는 주제가 추가되긴 하지만 - 대부분 모세오경이 제시한 주제가 상호관련성을 맺으며 심화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구약성서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성서를 읽을 때에 대부분 책별로 읽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성서 앞뒤를 쉴새없이 넘나들며 관련구절을 찾아야 하는 방식의 책읽기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서구절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구약성서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나타내는 다양한 방식들 - 어떤 주제가 여기서 암시되고 저기서 구체화되고, 또 여기서 예언되고 저기서 성취되는 흐름들 - 을 발견하며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가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느끼게 된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책의 주제가 구약개관 - 이것이 1부의 주제이다 -이 아니라 구약신학인 것을 고려해 볼 때, 저자만의 독특한 신학적 강조점이 좀 더 나타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구약성서의 전반적인 흐름을 책별로 개관하여 준 후(1부), 구약성서에 나타난 주제들을 나열하여 제시하여 주는 것(2부)이 이 책의 목표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한 면에서는 이 책이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차피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객관성이라는 것이 철저히 담보되기는 어렵다고 볼 때, 독자가 이러한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학자의 관점과 성서가 상호교류하는 것을 접하며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다양한 통찰들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의 얕은 소견에서 보았을 때는, 저자가 구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별로 잘 분류하여 나열해주고 있지만 렌토르프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학적 강조점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월터 브루거만의 경우, 그의 저서에는 ‘약자를 압제하는 체제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항거’라는 신학적 강조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가 모세 전승과 다윗 전승을 긴장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고 다윗 전승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성서 전체의 계시적 통일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약점이 있는 것은 분명한 한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뚜렷한 신학적 강조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많은 통찰과 자극을 주고 있다. 이에 반해 렌토르프는 너무 건전하고 균형잡힌 관점을 견지하고자 하는 나머지 그것이 오히려 독자들이 깊이 사고하도록 자극하고 밀어붙이는 힘이 약하게 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Posted by S. J. Hong
,

  『연옥의 탄생』은 아날학파의 거장 자크 르 고프가 연옥의 형성사를 연구하여 발표한 저서이다.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연옥의 탄생』은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중세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민중들의 삶, 그리고 여러 사상과 신앙의 교류들을 살펴보며 그 안에서 연옥의 개념이 싹트고 꽃피우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본서를 집필한 저자의 의도와 관심이 연옥사상의 신학적 정당성을 다루는 데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필자 역시 연옥 개념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보다는, 연옥에 대한 역사적 연구라는 본서의 주제에 맞게 본 서평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먼저 본서의 내용을 약술해 보도록 하겠다.

연옥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

저자는 본서의 제1부에서 고대근동과 유럽의 주요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내세 신앙을 개관하며 살펴본 후 거기에 이미 중세에 연옥사상이 형성되게 하는 씨앗이 될 만한 믿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대교 지혜문학과 예언서, 그리고 구약 외경과 위경들 안에도 천국과 지옥 외에 과도기적 형벌을 겪는 제3의 장소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연옥신앙을 배태한 보다 직접적인 씨앗들이 존재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는 세상에서 사함 받을 수 있는 죄가 있다는 논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과 지옥이 아닌 제3의 대기소에 대한 고중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바울이 피력하고 있는 ‘공력을 시험하는 불’ 사상을 들 수 있다. 이 본문은 천국으로 가기 전에 공력을 시험받고 정화되는 제3의 장소에 대한 암시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민간의 영역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많은 민담과 전설들이 형성되는 상상력의 원천이자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연옥 사상은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수많은 교부들과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통해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제2부에서는 초기의 ‘정화하는 불’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민간전승과 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연옥사상을 이루는 요소들이 점차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해갔던 4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연옥 사상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가다가 12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연옥이 시공간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명확히 정의되기 시작한다.

제3부에서는 이후 13세기에 스콜라 신학 안에서 연옥의 개념이 체계화되고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명확히 규정되고 법제화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와 같이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연옥 사상이 종합되어 녹아든 위대한 예술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 연옥사상의 문학적 종합이자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서는 『신곡』에 나타난 연옥 사상에 대한 해설에 마지막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중세에 연옥사상의 형성에 기여한 수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저자는 특별히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연옥 사상의 발전은 임박한 종말론의 퇴조로 인해 나타난 현세지향적 성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믿었기 때문에 개인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있는 시간적 공백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이 계속적으로 연기되어감에 따라 자연히 사람들 사이에는 죽음과 심판 사이의 기간에 영혼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크게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연옥 개념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연옥 형성사를 살펴보면 왜 연옥 사상이 12세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 12세기는 로마의 멸망 이후 쇠퇴를 경험하던 유럽사회가 다시 성장과 발전을 경험하기 시작한 번영의 시기였다. 이러한 번영의 시기에는 연옥사상이 흥왕하기에 알맞은 현세지향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연옥사상이 어떤 점에서 현세지향적 성향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는가? 연옥 사상의 요체는 죽음 이후에 망자가 사면가능한 죄들을 정화한 후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제3의 처소가 존재하며, 이 곳에 있는 망자들의 구원에 살아있는 자들이 기도와 보시, 미사 등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연옥은 구원의 기회를 죽음과 최후심판 사이로 연장하는 기능, 즉 구원에 있어서 ‘현세의 연장’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연옥의 그러한 측면이 현세에 안전하게 뿌리내린 채 천국의 희망을 붙잡기를 원했던 중세 말기 민중들의 갈망에 잘 맞아떨어지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연옥 사상을 형성한 사회적 요인의 또 다른 예로, 연옥사상이 교회가 민중들을 교화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유리한 점을 제공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연옥 사상을 통해 교회가 중세인들의 내세에까지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에 이 사상이 교회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법제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기독교신앙과 여러 민간전승과 전설들의 혼합, 거기에 구원을 향한 민중의 갈망과 민중을 도덕적으로 교화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교회의 필요들이 맞물려 돌아가며 연옥 교리는 형성되었고 중세교회사 속에 뚜렷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연구의 모범, 그리고 아날 학파

필자가 본서를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매우 광범위한 시대에 걸쳐 방대한 자료들을 조사하며 다양한 견해들을 비교 연구하고 있는 저자의 역사학자로서의 학문적 성실성이었다. 저자는 연옥 사상의 발아기부터 완성기까지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연구를 위해서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무려 천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타난 대부분의 연옥 관련 문헌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본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연옥이라는 연구 분야에서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에 일차적 가치가 있음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저자가 역사를 연구하는 태도와 방법론에서 역사연구의 한 전형과 모범을 배우게 되는 것에도 본서가 주는 추가적인 큰 유익이 있다는 역자의 평가에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또한 필자가 본서에 특히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점은 저자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민중들의 실제적 삶이 가지는 의미를 중시하고 그것을 역사적 사료로서 매우 가치있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저자가 속해 있는 학파의 학문적 경향성과 특징이기도 하다.

역사학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크 르 고프나 아날학파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크 르 고프는 역사학 분야에서 매우 큰 영향력과 입지를 가지고 있는 학파인 ‘아날학파’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계의 거두였다. 아날 학파는 기존 역사학자들이 위인이나 정치적 인물 위주로 역사를 이해하고 주요 정치적 사건의 연대 위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한 흐름이다. 이들은 정치적인 주요사건보다는 전체적인 사회 현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며, 위인이나 통치자, 정치인 등으로 대표되는 거물급 개인이 아니라 집단 전체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주요사건들의 연대를 통해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했던 기존의 역사학자들과 달리, 그 사회나 시대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를 파악하는 것을 더욱 중시하는 학파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역사연구에 있어서 ‘아날 학파’로서의 이러한 특징적인 접근법은 본서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만약 기존 역사학의 접근법대로 연옥 사상이 교회법이나 당대의 주요한 저술들 안에 정립되어 나타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연옥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연옥의 형성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의 아날학파적 관점에서 나온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 생각은 본서에 명시적으로는 한두 번 정도 언급되지만, 사실은 본서 전체에 깔려있는 기본적인 전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연옥 사상은 중세 시대의 민중들이 교회와 관계맺으며 살아가던 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형성되어간 것이며, 오히려 당대의 교회법이나 신학적 저술들은 실제적 삶의 자리에서 형성되어간 이 사상을 뒤늦게 따라가며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는 13~14세기의 연옥에 대한 스콜라적 체계화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12세기까지 흘러오며 연옥 사상을 무르익게 했던 민중과 교회가 공유했던 사회문화적 정황들에게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아날학파가 기존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과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역사연구방법론은 본서가 필자에게 주었던 매우 큰 통찰이자 유익이었다. 필자가 그동안 접해왔던 세속역사와 교회사의 내용들을 돌아보면 정치적 인물들과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역사 기술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쉼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이 역사의 주목을 받고 기록되는 것은 불가능함이 분명하다. 그래서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역사가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만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하게 되어 있으며, 그 선택에서 이미 ‘해석’이 일어나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이 배제된 객관적 역사서술에 대한 생각은 근대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역사학이란 결국 ‘무엇을 역사로 볼 것인가’하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기존의 정치적 인물과 정치적 사건들 위주의 역사 기술은 사실 세상은 그처럼 주목받는 소수가 아닌 수많은 무명인들의 집합인 민중들에 의해 흘러간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다소 냉소적인 진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택과 집중을 하다보면 세상이 관심을 가질 만한 유명인물과 유명사건에 역사기록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누적된 사료들이 또 후대의 역사연구에 사용되면서 역사연구가 전개되어 나간다고 할 때, 역사가가 굳이 유명인과 유명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에 대한 기록이 가장 쉽게 확보 가능한 사료들인 바, 유명인과 유명사건에 대한 연대기적 정보는 어차피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와 같이 자연히 한쪽으로 쏠리게 되는 경향성이 있을 때에 균형을 잡으려면 의식적으로 반대쪽으로 기울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정치적 인물과 사건보다 일반 민중의 삶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연구해 갈 때, 우리는 그를 매우 균형잡힌 역사가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법으로 기술된 역사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균형 잡히고 실제 모습에 근접한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필자는 아날 학파의 거장 자크 르 고프가 쓴 『연옥의 탄생』을 통해서 앞으로의 역사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받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이들 학파가 가진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이 더욱 역사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연옥사상의 절정 - 단테의 『신곡』, 연옥편

또한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본서의 마지막 장에서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연옥 개념을 해설하는 부분이었다. 필자는 『신곡』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고전 중에 하나로서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는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그래서 여러 번 『신곡』 읽기에 도전하였으나, 서사시라는 익숙치 않은 장르로 인해,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상징들에 질려서 매번 읽기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연옥에 대해 풍성한 이해를 갖도록 돕는 본서를 읽은 후에, 본서의 말미에서 저자의 해설과 함께 『신곡』의 연옥편을 조금 맛보니 그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깨달음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신곡』이 고대와 중세의 수많은 인물들의 삶과 사상들이 녹아들어가 있는 고도의 상징문학이며, 독자가 더 많이 알수록 더욱 수많은 보화를 캐낼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본서를 읽은 후 단테의 『신곡』 읽기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볼 마음을 갖게 된 것이 필자가 개인적으로 얻은 또 하나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며 - 소감, 평가

끝으로 필자가 본서를 읽으며 정리해 본 연옥에 대한 개인적 소견을 밝히며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는 그동안 중세 교회의 연옥 사상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필자가 연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이라고는, 중세 교회는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다고 믿었으며 연옥에 있던 사람들이 형벌의 분량을 채우면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이해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러한 연옥 사상은 이신칭의를 핵심으로 하는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 개신교도인 필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에게 있어서 연옥 사상은 도대체 출처를 알 수 없는 뜬금없는 교리였고, 중세기에 기독교의 교리가 수많은 미신과 전설, 관습들과 혼합되던 시기에 형성된 무지의 산물 정도로 간주되고 있었다. 게다가 종교개혁만이 우리 개신교도들이 연옥 사상을 접하게 되는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맥락이었다는 점도 연옥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었던 것 같다. 잘 알다시피, 중세 말기에 면죄부 판매가 바로 이 연옥사상과 결합되어 종교개혁을 야기할 정도로 극도로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도 연옥 사상은 마치 부패한 중세 교회가 돈벌이를 위해 창안해낸 개념인 듯한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껏 필자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현대 가톨릭 교회가 전근대의 무지를 통과한 후에도 -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 여전히 연옥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왜 가톨릭 교회에서 연옥의 교리가 유지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엔 필자의 연옥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고 피상적이었다. 그래서 현대 가톨릭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언젠가 연옥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볼 기회가 생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과목을 통해 『연옥의 탄생』을 소개받고 읽게 된 것은 필자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유익이었다 하겠다.

물론 본서를 읽고 난 후라 하여 필자가 이제 연옥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중세인들이 연옥 사상을 지지해준다고 믿었던 성서구절들은 성서 전체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한두 구절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부풀려 받아들이게 된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여전히 연옥 교리를 받아들이기 힘들고 그럴 필요성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본서를 읽으며 얻게 된 수확은 연옥 사상이 단지 이교적 신앙에 영향을 받은 교회의 변질이거나 또는 - 더 나쁘게는 - 교회가 중세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한 왜곡된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데에 있다. 연옥 사상은 중세인들이 그들의 신앙 안에서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성찰해낸 결과물이며 나름 그들의 세계 안에서 나름의 개연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었다. 또한 연옥 사상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즉,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출생하자마자 죽은 원죄만 있는 영아와 수많은 죄를 저지른 극악한 범죄자를 지옥에서 같은 방식으로 벌하시겠는가 하는 신정론적인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연옥 사상을 형성했던 종교적 요인 중 하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에 의거하여, 그 하나님의 공의가 죽음 이후의 심판의 공정함으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날 수 있도록 교리적 정합성을 추구했던 중세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방식은 우리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연옥 형성사는 이러한 신비를 이성에 납득이 되도록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회문화적 정황과 맞물려 점점 거대해진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옥 형성사를 돌아보며 신앙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직 밝히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영역을 계속 신비로 남겨두는 겸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S. J. Hong
,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간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니버의 인간관은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가능성’과 타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불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적절히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니버는 다른 한 쪽을 배제하여 인간을 가능적 존재거나 혹은 불가능적 존재로만 보려 하지 않고, “불가능한 가능성” 또는 “가능한 불가능성”이라는 역설적 술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니버가 보기에 정통주의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소홀히 하였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3장에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보편적 타락에 절대적인 강조는 인간 도덕성의 상대적인 차이를 무시해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만다. 따라서 “이것은 쉽게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무관심주의로 가는 경향이 있다.” 반면 그 반대쪽 극단에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했던 종교적 이상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이상을 사회윤리화하여 준수하게 한다면 그들이 속한 사회를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것이 월터 라우센부쉬로 대표되는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이었고 20세기 중후반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낙관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1,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의 인간 악의 심연을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들은 그들의 순진한 낙관론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

니버는 인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이러한 견해들의 부적합함을 인식하고,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소위 ‘기독교 현실주의’라 불리는 사회윤리와 정치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니버가 보기에 종교적 이상은 개인의 윤리성을 고양시키는데에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윤리의 영역에서 이러한 종교적 이상은 개인윤리에서처럼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한 집단 내부의 계층간의 관계나 또는 집단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역동을 고찰해 볼 때, 집단의 영역에서는 개인적 영역에서보다 이기심이나 비윤리성이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윤리의 영역에서는 사회에 속한 개인의 양심이나 종교적 감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제도나 규범, 강제력 등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니버는 계층 간 또는 집단 간의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정치적 기술을 통해서만 공동체를 더 질서있고 선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니버의 현실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니버의 사회윤리의 지향점은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다. 니버에 의하면, 기독교의 황금률과 같은 종교적 이상을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은 한 사회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사랑’의 근사치로서의 ‘정의’가 사회 안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오늘날에도 매우 적실성 있는 윤리적 관점과 틀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인류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극빈국과 부국 간의 빈부격차는 끝을 모르고 벌어지고 있다. 부국은 풍요 속에서 극도의 쾌락 추구로 자원을 낭비하고 있고 빈국에서는 기아와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또한 환경파괴와 전쟁의 위협은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는 어떠한 해답을 줄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에 의해 각성되고 회심한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통해 오늘날 당면해 있는 전세계적인 문제들을 점차 해결해가겠다는 이상은 현실성이 결여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교회사 속에서도 그와 같은 이상을 가지고 공동체 내에서 구현해보고자 했던 급진주의자들은 - 예컨대, 재세례파 - 대부분 사회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소종파(sect)로만 머물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소종파들이 기독교적 이상을 구현해가면서 세속사회에 귀감이 되고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한 방법일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으며 전세계가 직면한 거대한 문제를 해결해가기 위한 주된 접근법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세상이 더 악한 곳이 되는 것을 막고 정의가 진전되어져 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을 다루는 정치적 기술, 악을 제어하는 강제력 등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오늘날의 현실을 이해하고 해법을 제시하는데에 매우 적합하며 앞으로 더욱 적실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현실주의의 ‘현실성’ 추구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불의한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개혁적인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그 불의를 영속하는데 대한 합리적 명분으로 악용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기독교 현실주의에 입각한 정당전쟁론이 그 본래의 의도에서 이탈되어 미국이 중동의 패권과 석유이권을 장악하기 위해 중동전쟁을 일으키는데에 필요한 명분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많은 정치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기독교 현실주의가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실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우를 범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윤리적 비관주의로 귀결될 수 있고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사회의 윤리성 역시 약화되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윤리를 고양시키는데의 신앙의 역할, 그리고 집단윤리를 함양해가는데 필요한 사회, 정치적 역학은 상호공존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반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Posted by S. J. Hong
,

 리차드 니버는 그의 저서 『책임적 자아』에서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응답의 윤리(책임 윤리)라는 세가지 윤리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앞의 두 유형은 기존 윤리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른 것이고, 마지막 유형은 니버가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유형이라 할 수 있겠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간의 전통적인 구분은 윤리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보는냐에 달려 있다.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에서는 선(good)이 옳음(right)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신에게 선한 것을 추구하는 자이고 그 선을 증진시켜가는 것이 바로 옳은 것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는 만드는 존재(The maker)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빚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에서는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는 철학적 시도들이 중요해진다. 플라톤의 ‘덕’,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등은 모두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목적론적 윤리의 장점은 인간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가치를 창출해내는 존재로 그림으로써 뚜렷한 목표의식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추동력을 가지게 함이라 할 수 있다. 인류사 속에서 인간이 지금까지 이루어온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원동력은 이 만드는 존재로서의 인간상의 긍정적인 발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의 약점은 바로 이 목적이라는 것을 규정해주는 더 높은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 때에 많은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윤리적 상대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반면,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에서는 반대로 옳음이 선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한다.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것을 지킴으로서 선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론적 윤리는 시민(man-the-citizen), 즉 법을 지키는 자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의무론적 윤리에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에게 주어진 궁극적 법률은 무엇인가?”하는 것이 된다. 의무론적 윤리의 장점은 각 개인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윤리적 명령에 순응함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무론적 윤리는 옳은 것이 이미 절대적 규범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적 선택과정에서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이 소외되는 율법주의가 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니버가 제안하는 응답의 윤리(responsible ethic)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니버는 인간을 응답하는 존재로 제안한다. 목적론적 윤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선’이고 의무론적 윤리의 가치가 ‘옳음’인 것에 비해 응답의 윤리는 ‘적합한 것(The fitting)’을 추구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과해진 행위 또는 사건에 대해 적합한 반응으로 응답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응답의 윤리가 던지는 질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What's going on in the world?)”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결국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What is God doing in the world?)”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적합한 응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해석’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은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바로 이 ‘해석된 응답(이것이 적합한 응답이다)’을 하는 존재이다.

응답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들을 절묘하게 극복하는 윤리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응답의 윤리에서는 인간의 윤리가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기 때문에 - 이러한 니버의 사상을 “급진적 유일신론(radical monotheism)”이라고 부른다 - 윤리적 실천이 뿌리내릴 수 있는 분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응답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가 빠지기 쉬운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복한다. 또한 응답의 윤리는 인간이 적합한 응답(the fitting response)을 스스로 찾아가는 창의적 노력의 자리를 열어주고 있으므로 인간의 선택이 배제된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는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를 극복한다 하겠다.

그러나 응답의 윤리가 가지는 가장 큰 한계는 ‘적합한 응답’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적합한 응답의 기초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이 기초가 명확한 규범적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을 때에 이것 역시 윤리적 상대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으며(목적론적 윤리로 회귀함), 반대로 그 적합함에 대한 기준이 절대적으로 제시된다면 이것은 결국 의무론적 윤리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응답의 윤리가 앞선 두 윤리유형과 차별성을 가진 유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적합한 응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적합한 응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에, 결국 이 응답의 윤리는 그 이론적 정합성에 비해서 그것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요약하면, ‘적합한 응답’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으로 인한 구체성의 결여가 응답의 윤리가 가지는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Posted by S. J. Hong
,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사회전략이다” 또는 “교회가 사회윤리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에서 기독교윤리를 추출해내어 사회정책이나 사회윤리에 이식하여 법제화하거나 제도화하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서의 윤리는 사회를 위한 보편윤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를 위한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 가령, 윌리몬과의 공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하우어워스는 주기도문의 주어가 ‘우리’라는 사실에서 두 가지 통찰을 이끌어낸다. 첫째는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우리’라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은 개인경건을 위한 기도문이 아니고 공동체적 삶을 위한 기도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주기도문의 윤리적 함의대로 살아야 할 책임은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는 것 아니다. 교회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그것대로 살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 된다. 역시 윌리몬과 공저한 <십계명>을 이루는 중심사상도 동일하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회의 법이나 정책의 근거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에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교회는 세상과 차별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이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윤리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윤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기독교윤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가?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기독교윤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것은 세상에 복음의 진정성과 기독교윤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한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교회가 보여줄 때, 세상이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라 볼 수 있다. 가령, 교회가 평화을 이루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러한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폭력성을 깨닫게 된다. 교회가 인간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비인격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단지 기독교윤리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윤리로 자신의 존재가 형성된 사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우어워스는 이것을 ‘덕(virtue)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하우어워스에게 중요한 윤리적 의제는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덕의 윤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narrative)이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차적으로 성서의 내러티브가 중요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성서의 내러티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그러한 사람을 형성해낸다.

이상과 같이 하우어워스의 “교회가 사회전략이다”라는 주장의 의미를 약술해보았다. 이야기, 덕과 인격, 공동체를 강조하는 하우어워스의 접근법은 포스트모던시대에 매우 적합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모던시대에는 객관성을 중시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검증을 중시했으나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포스트모던시대에는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독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메타내러티브는 죽었다’는 리오타르의 선언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해체주의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거대담론은 배척하고 지역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을 중시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선포와 논쟁, 변증 등의 근대적인 방식보다는 이야기 들려주기, 삶으로 보여주기 등의 방식으로 세상에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우어워스의 방법은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시대에 큰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우어워스가 그것이 포스트모던시대에 통할만한 전략이기 때문에 이러한 윤리적 접근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교회가 묵묵히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질 때에 세상이 교회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삶보다 말이 앞서고, 결국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인들을 통해 교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심지어 사회적 지탄까지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맥락 속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는 의제를 가지고 있는 하우어워스의 윤리적 전략은 한국교회가 꼭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우어워스의 주장이 지나치게 교회중심적이고 기독교윤리를 교회내부의 윤리로만 가두어놓는 분파주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매우 일리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독교 윤리가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막스 스택하우스이다. 나는 이 양 진영의 주장 중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윤리는 하우어워스의 주장대로 일차적으로 교회를 향해 주신 것임이 분명하고 또한 동시에 스택하우스의 주장처럼 사회적 에토스를 형성하여 세상을 더욱 윤리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에 따라 기독교윤리가 교회의 윤리임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기독교윤리에 사회적, 공적 가치를 형성해내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도덕적 해이와 스캔들로 한국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이러한 맥락에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함으로 다시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을 일깨우는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야말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윤리학자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S. J. Hong
,

  류터는 그의 저서 <가이아와 하느님>에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오늘날의 생태계의 위기상황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류터의 논지를 약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류터는 가부장제의 뿌리가 이원론적 세계관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고대 희랍인들에게서 시작되어 서구세계의 정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 세계이해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정신, 이성)과 신체로 나뉘어지고, 세계는 인간과 자연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의 사상에서 유래한 이 헬라식 이원론에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유형의 이원론을 ‘계층적 이원론’이라 한다. 가령, 계층적 이원론에 의하면 영혼은 육체보다 우월하다. 또한 이성은 감정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계층론적 이원론은 남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성적인 남성은 감정적인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형성한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전제에 의해 가부장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힘의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일이 먼저 일어났고 이것이 가부장적인 문화와 사회제도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계층적 이원론이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철학적인 합리화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계층적 이원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이며, 자연은 인간의 복지를 위해 이용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계층적 이원론은 남성의 여성 지배의 철학적 근간을 이루었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자연 지배와 착취의 철학적 근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류터를 비롯한 생태여성신학자(eco-feminist)들의 주장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생태여성신학자들이 히브리-기독교 전통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가? 대다수의 생태여성신학자들은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남성적이며 가부장적인 모습을 띄고 있고 이것이 남성의 가부장적인 세계지배에 일조했다고 비판한다. 류터 역시 이 부분에서는 그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생태여성신학자들이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능성을 히브리-기독교 전통에서 찾는 것에 대해 비관적인 반면에, 류터는 히브리-기독교적 유산에 해당하는 계약 전통과 성례전 전통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생태여성신학자로서 류터가 가지는 특별한 위치라 할 수 있겠다.

린 화이트의 <The historical roots of ecological crisis> 이후로 히브리-기독교 세계관은 생태위기를 조장한 주범으로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류터도 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린 화이트의 주장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히브리-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헬라적인 이원론이 기독교세계와 만나면서 히브리 전통이 가진 고유의 관점을 왜곡시킨 상태에서 유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류터는 오히려 히브리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인격적이고 협력적인 상호돌봄의 관계를 이뤄낼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가령, 희년 사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히브리성서에 나타나는 희년의 비전은 인간의 죄악에 의해 발생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배와 착취, 폭력과 굴종,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남용과 착취, 수탈과 파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인 치유와 회복을 통하여 바로잡아야 하는 것으로 본다.

나 역시 히브리-기독교 세계관 안에 오늘날의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풍성한 유산들이 있음에 동의한다. 이 풍성한 유산을 우리의 사유와 실천의 토대로 삼을 때 우리는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의미있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히브리적인 인간이해는 육체를 멸시하고 영혼이나 이성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관점이 아니라 육체를 긍정하고 존중한다. 또한 이 세상을 부패하고 악한 것으로 보며 선하고 거룩한 타계로 구원받는 것을 지향하는 헬라적인 세계이해와 달리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 타락으로 인해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이 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선함과 아름다움의 요소가 남아있다. 그리고 히브리-기독교의 종말론적 소망은 창조세계의 선함이 완전히 회복되는 때를 소망한다. 류터가 히브리-기독교의 계약전통, 성례전전통에서 생태위기 극복의 희망을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류터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기독교종말론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류터는 기독교적인 생태윤리와 기독교의 묵시종말론적 소망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류터는 <가이아와 하느님> 3장 ‘세계 파괴의 종교적 이야기들’에서 기독교의 묵시종말론을 다룬다. 장의 제목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류터는 기독교의 묵시종말론적 소망을 생태위기 극복의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 묵시종말론적 소망이 지구와 인간이 공동운명체로 묶여 있음을 인식하고 지구를 책임있게 돌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이후에 오게 될 새로운 낙원을 기다리는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조장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류터의 연구에 참된 기독교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풍성한 의미들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타계지향적이고 구원 이외의 영역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한 태도를 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은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연구들이 성서가 말하는 종말과 구원은 이 세상은 사라져버리고 타계에서 영혼만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창조의 선함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개입과 회복을 말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 종말론은 헬라 이원론과 달리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한 종말론적인 윤리는 이 땅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안에서 살면서 청지기로서 피조세계를 책임감있게 돌보는 삶을 요청한다. 류터가 이러한 기독교종말론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계약, 성례전 전통과 잘 연결시켜 담아내었다면 생태위기 극복에 대한 좀 더 통전적이고 균형잡힌 기독교적 조망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Posted by S. J. Ho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