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니버는 그의 저서 『책임적 자아』에서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응답의 윤리(책임 윤리)라는 세가지 윤리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앞의 두 유형은 기존 윤리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른 것이고, 마지막 유형은 니버가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유형이라 할 수 있겠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간의 전통적인 구분은 윤리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보는냐에 달려 있다.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에서는 선(good)이 옳음(right)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신에게 선한 것을 추구하는 자이고 그 선을 증진시켜가는 것이 바로 옳은 것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는 만드는 존재(The maker)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빚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에서는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는 철학적 시도들이 중요해진다. 플라톤의 ‘덕’,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등은 모두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목적론적 윤리의 장점은 인간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가치를 창출해내는 존재로 그림으로써 뚜렷한 목표의식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추동력을 가지게 함이라 할 수 있다. 인류사 속에서 인간이 지금까지 이루어온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원동력은 이 만드는 존재로서의 인간상의 긍정적인 발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의 약점은 바로 이 목적이라는 것을 규정해주는 더 높은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 때에 많은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윤리적 상대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반면,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에서는 반대로 옳음이 선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한다.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것을 지킴으로서 선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론적 윤리는 시민(man-the-citizen), 즉 법을 지키는 자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의무론적 윤리에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에게 주어진 궁극적 법률은 무엇인가?”하는 것이 된다. 의무론적 윤리의 장점은 각 개인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윤리적 명령에 순응함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무론적 윤리는 옳은 것이 이미 절대적 규범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적 선택과정에서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이 소외되는 율법주의가 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니버가 제안하는 응답의 윤리(responsible ethic)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니버는 인간을 응답하는 존재로 제안한다. 목적론적 윤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선’이고 의무론적 윤리의 가치가 ‘옳음’인 것에 비해 응답의 윤리는 ‘적합한 것(The fitting)’을 추구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과해진 행위 또는 사건에 대해 적합한 반응으로 응답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응답의 윤리가 던지는 질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What's going on in the world?)”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결국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What is God doing in the world?)”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적합한 응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해석’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은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바로 이 ‘해석된 응답(이것이 적합한 응답이다)’을 하는 존재이다.

응답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들을 절묘하게 극복하는 윤리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응답의 윤리에서는 인간의 윤리가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기 때문에 - 이러한 니버의 사상을 “급진적 유일신론(radical monotheism)”이라고 부른다 - 윤리적 실천이 뿌리내릴 수 있는 분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응답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가 빠지기 쉬운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복한다. 또한 응답의 윤리는 인간이 적합한 응답(the fitting response)을 스스로 찾아가는 창의적 노력의 자리를 열어주고 있으므로 인간의 선택이 배제된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는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를 극복한다 하겠다.

그러나 응답의 윤리가 가지는 가장 큰 한계는 ‘적합한 응답’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적합한 응답의 기초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이 기초가 명확한 규범적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을 때에 이것 역시 윤리적 상대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으며(목적론적 윤리로 회귀함), 반대로 그 적합함에 대한 기준이 절대적으로 제시된다면 이것은 결국 의무론적 윤리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응답의 윤리가 앞선 두 윤리유형과 차별성을 가진 유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적합한 응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적합한 응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에, 결국 이 응답의 윤리는 그 이론적 정합성에 비해서 그것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요약하면, ‘적합한 응답’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으로 인한 구체성의 결여가 응답의 윤리가 가지는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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