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한미FTA로 들끓고 있는 이 시점에, 나름 경제학 전공자로서 한두마디 보태봅니다(며칠 전 제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댓글로 후배들과 짧게 토론했던 내용을 약간 바꾸어 올립니다).

FTA찬성론은 데이빗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이라는 이론적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의 맹점은 장하준이 가장 설득력있게 반박하고 있습니다(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참고).
이 이론이 그 이론적 정합성만큼이나 현실에 부합하려면, 실제 노동시장이 절대적인 유연성을 띄고 있어야 합니다. 가령, FTA의 여파로 망하게 된 농민이 핸드폰이나 자동차산업, 여타 서비스업으로 신속하게 흡수될 수 있다면 자유무역이 교역국 양자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비교우위론은 현실에서도 잘 작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농민 할아버지가 2,3차... 산업 현장에 즉시 투입되는 절대유연한 노동시장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허구의 개념입니다(즉시 투입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영구적으로 투입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그 이득이란 것은 결국 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세워진 다른 누군가의 이득일뿐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잃는 쪽은 이미 가난했던 사람이고 얻는 쪽은 이미 부했던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주류경제학은 그런 점을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 등을 조합해서 세상을 단순하게 설명하지만 그 이론이 얼마나 빈약한 현실적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보면 놀랄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재 FTA의 독소조항이 악용될 가능성은 단지 비교우위론의 비현실성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문제입니다.

제가 현재의 한미FTA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존의 저의 정치적 입장과 선호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한미FTA반대집회에 참석하러 시청광장에 나갔습니다. 거기서 이 불평등협정에 반대하는 농민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간절한 호소를 들을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국익’이라는 개념은 사실 허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독소조항을 그대로 유지해도 우리나라에도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가 국익일까요? GDP수치가 오르면 국익일까요? 농민들의 피눈물과 핸드폰, 자동차 판매량을 바꾸면 그게 국익인걸까요?
만약 우리나라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상대적 빈국과 불평등협정을 시도한다면 저는 지금의 간절함으로 그 협정을 반대합니다.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당장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 나라의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보시고 그 울부짖음을 들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의 FTA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협정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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