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성서신학자 D.A.카슨의 저작으로, 이머징교회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비판서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머징교회운동을 현세대에 복음과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지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머징교회운동가들의 저작을 읽을때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감지되어, 이 운동의 명과 암을 균형있게 이해하고자 몇몇 비판서들을 읽었었다. 
그러나 그간 읽어온 이머징교회 비판서들(가령, 마이클 호튼이나 데이비스 웰스의 저작)은 이 운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공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에 비해서 이 책은 앞서 말한 책들보다 이머징교회운동에 대한 이해가 더 깊으며 그에 기반한 매우 적절하고 예리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은 후 나의 고민도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한계는 있다. 가령, 저자가 묘사하는 이머징교회의 특징이 과연 전체 이머징교회운동을 충분히 대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머징교회운동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머징교회운동을 '강경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극단적 관점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과연 이머징교회 운동가들은 모두 강경한 포스트모더니스트 또는 극단적 관점주의자들인가? 그들은 우리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가? '그들 자신이 진리주장에 대해 불신하고 냉소한다는 것'과 '진리주장을 불신하고 냉소하는 세대에 효과적으로 접근하고 소통하기 위해 그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나 역시 후자의 이유로 인해 이머징교회운동에서 가능성을 보고 지지하는 것이지, 강경한 포스트모더니스트나 극단적 관점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머징교회 바로 알기>보다는 <강경한 포스트모더니즘 바로 알기>나 <극단적 관점주의 바로 알기> 정도의 제목이었다면, 제목이 제시하는 목표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 전체는 귀담아 들어야 할 예리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가령, 이머징교회 운동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A가 아닌 B로" 라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화한 도식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이러한 도식화가 기존 기독교 전통의 소중한 유산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한다(예컨대, 이머징교회운동이 자주 주창하는 "명제(교리)가 아닌 이야기로"라는 슬로건을 보자. 이것은 우리시대에도 변함없이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교리와 명제를 더이상 가치없고 무용한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뉘앙스를 풍긴다). 여전히 중요한 것을 부정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주장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머징교회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갱신운동과 개혁운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므로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보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머징교회의 접근법은 '되는 것'과 '속하는 것' 사이의 긴장을 성경적으로 충실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이 운동이 충분히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총평을 하자면, 이 책은 치밀한 논리와 설득력으로 비판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앞서 말한 이 책의 한계(이머징교회의 다소 치우친 형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약점이 아니라 실은 장점이 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이 책이 이머징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머징교회의 다소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 책은 이머징교회와 그 운동가들을 향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 선을 넘고자 한다면 이 책의 문제제기에 충실히 답변해낼 수 있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즉, 일종의 경계선 설정이며 경고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고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이머징교회운동을 지지한다. 그들이 나와 같은 믿음을 고수하는 가운데(예수그리스도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가 점근선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음을 믿는 입장), 이 포스트모던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이머징교회라는 '방법'을 취하는 것일 경우에 나는 여전히 그들의 방법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으며 그들을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에 나는 이 운동이 빠질 수 있는 함정에 주의하면서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변화이다. 역시 
이머징교회에 대한 최고의 비판서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학문적으로 가장 옳지 못한 태도는 당사자들의 주장을 접하지 않고 비판서만 읽고 손쉽게 정리해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 먼저 이머징교회운동가들의 주장에 귀기울여 본 후에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또한 이머징교회를 지지하는 분들께도 이 운동에 대한 균형잡힌 인식을 위해 한 권의 비판서를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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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마크 A. 놀 지음, 박세혁 옮김/IVP

나는 이 책이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와 더불어 복음주의를 이해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둘 다 복음주의를 분석한 명저이지만 두 책의 논조는 매우 다르다.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와...>에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복음주의를 차별성있게 포지셔닝한 후, 복음주의가 걸어온 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미래 역시 희망적으로 조망해가고 있다(물론 맥그라스도 복음주의의 어두운 면을 한 챕터를 할애해 예리하게 기술하고 있긴 하다).
그에 비해 마크 놀은 이 책에서 맥그라스만큼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를 분명하게 구분짓지는 않는듯 하다(나는 그가 세운 범주가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복음주의자의 다수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러한 근본주의적 성향의 복음주의의 가장 치명적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미국의 복음주의에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를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마크놀이 보여주는 복음주의의 어두운 면, 가령, 종말론에서의 극단적인 세대주의 성향, 정치에서의 미국 패권주의(기독교 우파), 과학에서의 성서문자주의에 기반한 창조과학 등은 미국 교회의 쌍둥이 형제인 한국교회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내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갈 책임이 있는 우리 시대의 복음주의자들이 필독해야 할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기회가 된다면 신대원 마치기 전에 학우들과 한 번 스터디해보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음주의의 반지성적 성향을 타겟으로 하여 쓰여진 책이지 복음주의를 균형잡힌 안목으로 정리해주고자 쓰여진 책이 아니다. 따라서 복음주의에 대한 평가가 다소 야박한 감이 있다. 복음주의의 공과 과를 균형있게 이해하려면 꼭 맥그라스의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도 병행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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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쯤 접하게 되는 문제의 그 책이다.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과 여러 독서가들의 호평 속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으나 결과적으로 나에겐 좀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자기 분야에 출판되는 대부분의 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직업인들, 가령 학자나 출판업자에게는 이 책의 논지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하지만 그것도 그들에게 이 책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다기보다는 이미 사용해 오던 방법의 의의에 대해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해주는 책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규모없는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의 과격한 주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책들 사이의 지형도를 파악하는 것이 손에 잡히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어제끼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런 점
에서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어느 한 책으로 치우쳐 버리지 않고 책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제목과 목차, 카탈로그 외에는 결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는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의 사서의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 사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책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교양에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독서에도 틀려먹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존재하는 책들의 수를 고려할 때, 우리로서는 사서처럼 총체적 시각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갈 것인지 하는 선택이 불가피하며, 전체를 통제한다는 측면에서는 모든 독서가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에너지 낭비인 것이다.
 이 입장의 지혜로움은 진정한 교양은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러한 전체성의 추구는 개개의 책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이 책 전체는 이와 같이 일면 맞는 말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궤변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결코 말해서는 안된다는 죄책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체한다. 가령, 책읽기보다 책들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던지, 다른 사람이 책에 관해 하는 얘길 귀동냥해도 충분하다던지, 읽고나면 어차피 다 까먹어서 안 읽은 것과 똑같이 되버린다던지, 심지어는 내가 안 읽고 이야기해도 결국 딴 사람도 안 읽었거나 까먹어서 잘모른다는 등의 논리이다(저자의 주장을 희화화한 측면도 있지만 저자 역시 익살맞은 문체로 자신의 주장을 약간은 희화화해가며 설명해가고 있으므로 뉘앙스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저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단계씩 쌓아올린 논지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의 마지막 장(대처요령 제4장 자기 얘기를 할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해 말하면서 비평 자체가 텍스트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창의적인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화가에게 자연이 작품의 소재로서의 부차적인 위치만 가지는 것처럼 비평가에게 텍스트 역시 비평이라는 작품의 소재로서의 부차적인 위치만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에 담긴 정확한 사실을 알고 비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텍스트를 매개체로 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해나가라고 역설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 창의성이 질식되어버린 사람들(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주장이다. 나에게도 마지막 장은 이 책에서 가장 유익했던 장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이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전제가 읽는 내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타나는 독서의 목적, 그리고 책에 대한 담론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 정도인 듯 하다. 
첫째는, 지식인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과 권위를 나타내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이 권위는 그 전문가가 자기 분야의 꽤 비중있는 저서에 대해 "그 책 안 읽었는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심각하게 손상된다. 따라서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술은 필수적이다).  
둘째로, 교양인들 사이의 사교활동의 수단이다(여기서도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기술이 중요하다).
하긴 나 역시 학자연하기 위한 허영심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독서의 동기, 그리고 책을 둘러싼 담론에는 분명 그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책 읽기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
저자가 아무리 책에 대한 총체적 조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를 유혹하고, 망각의 힘을 이야기하며 나의 독서의욕을 꺾고(?) 허무감에 빠뜨려도, 나는 여전히 '책 한권과의 깊은 만남'의 힘을 믿는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 역시 사역자로서, 주위사람들에게 책을 소개할 기회도 자주 있는 편이며, 따라서 신앙서적과 일반서적을 균형있게 다독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익한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한 권 한 권의 책을 정독해 나가는 것의 기회비용이 책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놓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생각을 자라게 하고 삶을 변화시킨 것은 책에 관한 정보나 전체적인 조망이 아니라 각각의 책과의 깊은 만남이었다.
무질의 사서는 한 책에 빠져 균형을 잃지 않고 책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아무 책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독서는 영향받고 설득당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무비판적으로 독서한다는 뜻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는 것조차 그 과정을 통해 저자의 생각과 교류하고 성장하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망각의 힘은 대단하다. 나에게 지금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책도 몇 년이 지나면 읽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로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에 담긴 정보는 잊혀진다 할지라도 책과 나 사이에 일어난 생각의 상호 교류는 계속해서 나의 가치관과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망각의 힘에 굴복하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는 이유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성실히 소개할 책임이 있는 전문인은 논외로 하자(기독교 전임사역자는 그 범주에 속할까 아리송했지만 나는 속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사역자는 평생 성실히 공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는 사람은 아니다).
책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할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기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읽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책과의 진지한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책 정보와 저자 이름 나열해 가며 학자연하고 싶은 지적 허영심에 대한 좋은 해독제가 될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 책보다는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도 있다)을 권하겠다. 애들러는 1~4단계의 독서법을 소개한 후, 각각의 책의 중요성에 따라 그에 맞는 단계를 적용하여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건강하고 균형잡힌 가이드라고 생각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읽어보니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여 공격했다는 혐의를 피할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좋은 동기로 쓰여진 책임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책이 꽤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책이기 때문에,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의 좋은 습관을 망칠수도 있는 위험성이 느껴져 나름 반박의 글을 써보았다. 어차피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자신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매개로 하여 내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나갔으니 자기 책의 마지막 장을 충실히 실천했다고 오히려 나를 칭찬해주지 않을까?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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