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청년사역은 현재 침체기를 겪고 있다. 주일학교의 쇠퇴와 함께 청년사역의 침체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교회 청년부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수평이동을 통한 양적 성장이 일어나고 있을뿐, 복음 전도를 통해 건강한 성장이 일어나고 있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대형교회의 수평이동을 통한 교회성장은 마치 여전히 활발히 성장하고 있는 청년부가 있으므로 별문제가 없는 듯이 착각하게 하여 명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 청년부의 이러한 방식의 성장은 주위의 작은 교회 청년부들을 고사시키고 있어 전체적인 한국교회의 건강도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다. 청년사역의 상황들이 교회보다 몇 년 앞서 나타나는 곳이 바로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 선교단체들이다. 따라서 선교단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앞으로 한국교회의 청년사역이 흘러가게 될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다 하겠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대학생 선교단체 IVF에서 간사로 사역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생 선교단체의 상황을 통해 본 청년사역의 현주소에 대해 정리해 보고 그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무너진 두 축: 기신자 양육과 불신자 전도

 2009년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주최한 제5회 캠퍼스사역 컨퍼런스 “청년사역 길을 묻다”에서는 2009까지의 약 십여년 동안의 대학생 선교단체들의 여름수련회 참석 인원을 합산한 통계를 제시하였다. 선교단체들의 인원 증감 추이를 알고자 할 때에 여름수련회 참석인원은 곧 핵심멤버십의 수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미가 크다. 대부분의 경우에 여름수련회 참석여부가 그 공동체의 멤버십으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지 아닌지의 첫 번째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여름수련회 참가 규모의 추세를 살펴보면 2001년 이후 감소추세를 보이던 경향이 한동안 현상유지 내지는 소폭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2006년을 정점으로 2008, 2009년 모두 3000명 정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즉, 최근 5년 사이에 선교단체 멤버십이 매우 가파른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양한 원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중 두 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살펴본 후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첫째, 자발적으로 선교단체를 찾아오는 크리스천 대학생들이 급격히 줄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압박감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IMF 이후 한국사회는 사회안전망이 무너진 극단적인 경쟁체제의 사회로 재편되었다. 고용안정성이 매우 낮아지고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그 속에서 개인들은 취업 부담을 초중고시절부터 느끼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대학생들이 입학 때부터 취업을 위한 학점관리와 영어공부, 각종 자격증 시험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제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선교단체를 통해 신앙훈련을 받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신앙의 훈련은 교회에서 받는 것으로 충분하고 대학에서는 동아리활동을 하지 않고 취업준비에 매달리거나 또는 취업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활동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필자가 선교단체에서 사역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신앙의 성장을 대학생 시절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로 설정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기 위해 선교단체를 찾아다니는 크리스천 대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학생들의 비율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캠퍼스에서 복음전도가 어려워져 간다는 점이다. 단체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근래의 한국사회에 형성된 반기독교적 정서는 복음전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근래에 한국사회의 교회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 되었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다. 몇몇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축재와 성추문,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망언, 그리고 크리스천 정치인들의 실정은 사회적 이슈에 민감한 청년기의 비그리스도인 대학생들이 교회를 불신하고 나아가 교회에 적대적이 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 상황을 좀 더 풀어 설명해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위에 약술한 기신자 양육과 불신자 전도는 그동안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성장해갈 수 있었던 중요한 두가지 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체계적인 훈련과 성장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을 받아서 양육하고 리더로 훈련시켜 그들이 후배들을 양육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여 재생산이 일어나게 한다. 또한 비그리스도인 대학생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선교단체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캠퍼스 안에서 한국사회와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인 리더를 길러냄을 통해 교회병행단체(para-church)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해왔다. 그런데 현재 대학생 선교단체는 이 두 축이 모두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청년 사역은 어떠한 상황일까? 선교단체 사역의 두 축-기신자 양육, 불신자 전도-을 교회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선교단체는 교회와 선교단체를 굳이 병행하면서까지 신앙생활에 시간을 할애하려고 하지 않는 대학생들의 태도와 직면하고 있다고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바꿔 말하면, 기신자 양육의 경우에 있어서 교회는 취업의 압박과 무한경쟁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에게 신앙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기신자 양육에 있어서 선교단체와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학교, 특히 중고등부의 붕괴에 가까운 몰락으로 인한 기신자 청년 유입의 감소이다. 교회학교에서 성장해 올라오는 기신자 청년들을 받아서 이탈자 없이 잘 정착시키고 불신자 전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교회학교의 아동과 청소년들이 각각의 단계를 거치며 이탈하거나 낙오하지 않고 차근차근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청년부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교회학교 역시 청년부 못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중고등부의 경우, 입시 압박에 눌려 주일성수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입시 마칠때까지만’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암묵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방조하고 있다. 이에 많은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이 이 시기에 입시준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잠정적으로 교회를 떠나거나 명목상의 교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또한 청소년들이 사춘기에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민들에 교회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며, 무신론적 전제 위에서 펼쳐지는 학교교육에 대해 교회가 적절한 대응을 해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모태신앙으로 명목상의 신앙생활을 이어오던 청소년들이 결국 이 시기에 신앙의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학입시 이후에 부메랑에 되어 고스란히 돌아와 청년사역에 타격을 입힌다. 결국 붕괴에 가까운 중고등부의 몰락은 청년부의 인원 감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회 청년부는 대학생 선교단체와 그 원인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기신자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신자 전도에 있어서는 교회 청년부 역시 대학생 선교단체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반기독교 정서에 직면해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제자로 삼는 것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교회 청년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장하는 교회 청년부라 하여 들여다보면 역량있는 사역자, 체계적인 프로그램, 많은 예산을 투입해 만들어낸 수준높은 볼거리와 문화컨텐츠 등으로 기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수평이동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한국교회 청년부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청년부와 대학생 선교단체는 기신자 수의 감소와 불신자 전도의 어려움이라는 이중고를 함께 겪고 있다. 이에 대학생 선교단체들은 현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고 있고 저마다의 해법과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청년사역이 위기라는 것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 아직은 선교단체만큼 그리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사역에 대한 세미나들을 찾아가보면 수평이동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을 흉내내려고 벤치마킹하고 있는 수준이며, '청년사역의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던대로 더욱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청년사역이 처한 현재의 맥락과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해법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최선을 다해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 위기이자 기회

 청년사역에 있어서 포스트모던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역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모던시대는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로 시작되었다. 근대의 성과인 과학혁명은 인간이 유토피아를 이 땅 가운데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1,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냉전체제가 야기한 크고 작은 전쟁들은 이러한 기대와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모던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포스트모더니티는 붕괴해가는 모더니티가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모더니티와 상반되는 특성들을 보이게 된다. 가령, 진리검증과 객관성이 중시되었던 모더니티와 달리 포스트모더니티는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모던시대에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과 참사들이 자신의 이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티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메타내러티브들을 불신한다. 이것이 리오타르가 그의 저서 「Postmodern condition」에서 “메타내러티브는 죽었다”고 선언하게 된 맥락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권위를 가지는 메타내러티브는 없다. 지역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에 속한 각 사람들에게 의미있을 뿐이고, 각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속해 있는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절대 진리에 대한 주장은 비난받고 관용은 가장 모범적인 태도로 칭송받는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티를 지배하고 있는 태도이다.
 
또한 모던시대는 자율적 자아로서의 개인이 강조되었던 반면에 포스트모던시대에는 공동체가 강조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시대의 공동체는 모던시대의 전체주의와 같이 획일화를 강요하는 태도가 아니라, 각자가 속한 곳이 자신의 준거집단이 되는 수많은 지역공동체들의 활성화, 즉, 부족주의(tribalism)와 같은 개념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청년사역자 지미 롱은 그의 저서 「Emerging hope」에서 모더니티의 특징을 객관적 진리, 개인, 과학적 발견, 거대 서사(사회진보)로 요약한 후, 그에 대응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징을 주관적 진리(기호), 공동체, 가상현실, 미시 서사(사회적 냉소주의)로 제시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이 위기인가 기회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는 위기로 보는 견해들이 우세해왔다. 포스트모더니티가 진리 주장에 대해 불신하고 진리를 개인의 기호의 문제로 대체해버렸기 때문에 포스트모던시대는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적 특성을 띨 수밖에 없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제시하는 기독교 복음 전도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전 작고한 스탠리 그렌츠를 필두로 하여 그밖의 여러 학자와 사역자들에 의해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에 맞는 사역을 해나갈 때에 이 시대는 기독교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들도 최근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에 필자는 포스트모던을 기회로 보는 입장들에 기반하여 필자의 사역경험과 접목하여 청년 사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부족하나마 의견을 개진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던시대의 청년사역: 삶에 체화된 공동체 전도로의 체질 개선

 미국의 전도학 교수이자 청년 사역자인 릭 리처드슨은 그의 저서 「스타벅스 세대를 위한 전도」에서 포스트모던시대에 필요한 전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책임감을 통한 전도보다는 성령과의 민감한 동역이어야 한다. 둘째, 개인전도보다는 공동체전도가 적합하다. 셋째, 교리 선포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넷째, 계약 관계가 아닌 참된 우정이 필요하다. 다섯째, 진부하지 않고 신선해야 한다. 여섯째, 이벤트로서의 회심보다 신앙의 여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지면의 부족으로 충분히 상술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이중에서 특히 이야기와 공동체야말로 포스트모던 전도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진솔한 이야기는 삶을 변화시킨다. 합리성과 교리적 정확성이 강조되었던 모던시대가 '변증'의 시대였다고 하면 이야기를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시대는 '간증'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설교와 성경공부에 있어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시대에 공동체를 통한 복음전도는 필수적이다.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고 나서 공동체에 소속되기보다는 그들에게 먼저 공동체가 되어준 후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진리주장에 냉소하는 포스트모던시대에 있어서 구도자에게 복음의 진정성을 확신시켜주는 최고의 변증은 이제 언어적 변증이기보다는, 그들을 공동체로 이끌어서 복음대로 사는 공동체를 직접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선교단체는 최근 스스로 선교단체를 찾아오는 기신자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불신자 전도가 쉽지 않게 됨에 따라 몇 년 전부터 사역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해왔다. 앞서 선교단체들의 성장의 두 축이 기신자 양육과 불신자 전도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이 그동안은 불신자 전도보다는 기신자 양육을 통해 캠퍼스에서 그리스도인 리더를 양육해내는 것에 더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리더로 성장하기까지 대학 4년이라는 기간은 다소 부족한 감이 있고, 그로 인해 리더십의 재생산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결과는 멤버십 감소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운동을 효과적으로 이어나갈 수 없게 되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신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양육하는 것에 충분히 집중하지 않고 한동안 복음전도에만 매진해보면 그 공동체는 곧 멤버십 감소를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동안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은 공동체의 역량을 기신자 양육에 더 집중해왔고, 지역교회에서 일년에 한두 차례 전도행사를 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벤트성 복음전도를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필자가 속한 선교단체는 복음전도 공동체로의 체질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그리스도인 신입생들에게 단체를 알리고 홍보하는 사역도 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비그리스도인 신입생들의 대학 적응을 도와주며 친구가 되어주고 공동체가 되어주는 것에 공동체의 역량을 집중한다. 그 결과 신자와 비신자가 공동체 내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게 되며 심지어 비신자가 신자보다 더 많이 있는 그룹도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체의 기독교적 특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학생들이 빠져나가면서 다소간의 비율조정이 일어나지만, 그 중 일부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진 않았지만 기독교에 호감을 느끼고 공동체 안에 남아 있게 되는 학생들도 생긴다. 이것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들이 있다. 과거에 이벤트성 전도가 주된 흐름이었을 때에는 복음 전도를 은사와 열정이 있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기고 무관심했던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적인 전환 이후로는 공동체 안에 항상 신자와 비신자가 공존하고 있으므로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를 자신의 이슈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신자가 공동체 안에 공존하는 것이 주는 또 다른 유익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무례하고 교양 없는 사람들로 낙인찍히게 된 데에는 주로 신자들끼리만 어울려 지내다보니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다문화사회를 살아가는 시민교양을 습득하지 못했던 것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선교단체 안에서 신자와 비신자가 어울려 지내는 것은 기신자들이 비신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성숙해지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인이 다문화사회를 살아가는 시민교양을 가질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타협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성숙한 시민교양을 습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 복음을 활력 있게 전하게 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또한 지난 수십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운영해온 청년사역 커리큘럼에 대한 재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년사역에 있어서 소그룹과 수련회 등의 훈련커리큘럼이 가지고 있는 예측가능한 전형성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진부함과 식상함을 느끼고 있다. 물론 프로그램의 창의성 유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도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성장과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변화되어가는 청년들의 필요에 맞게 사역 커리큘럼을 전환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포스트모던시대의 청년들은 참여적인 방식일 때에 가장 잘 배우고 종교적인 미사여구보다는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리고 공동체에 소속감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체험을 원한다.

몇년 전에 필자는 이러한 청년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겨울수련회를 새로운 형식으로 변화시켰던 경험이 있다. 강의와 소그룹, 저녁집회와 기도회 등의 예배당 중심의 신앙체험과 강의실 중심의 배움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수련회를 탈피하여, 공동체 탐방과 도보여행을 결합한 방식의 수련회였다. 전반부 삼일은 농촌에서 친환경농업과 적정기술연구소와 대안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는 기독공동체를 방문하여 그곳에 계신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예배드리고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적정기술 연구소를 탐방하고 함께 노동도 하며 보냈다. 학생들에게 세상의 필요와 자신의 진로를 연결지어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실제적인 도전을 얻게 된 시간이었다. 또한 대안학교 이야기를 들으며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게 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넷째날부터 삼일동안은 학생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혹한에 눈이 채 녹지 않은 산길을 걸으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서로 붙잡아주고 힘내라고 격려해가며 학생들과 필자는 수련회장 안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공동체성과 소속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필자와 학생들에게 그 수련회는 우리의 신앙여정에 있어서 잊지 못할 귀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필자는 이러한 참여적인 방식의 수련회가 전통적인 방식의 수련회와 함께 병행될 때에 가장 효과적인 훈련과 양육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수련회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깊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으며, 양육프로그램 중에는 여전히 강의실에서 배우는 것이 더 효과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사역의 장점을 잘 살려가는 가운데, 변화와 쇄신을 시도
하는 균형잡힌 지혜가 요구된다.

이상과 같이 우리 시대를 위한 청년사역의 방향성 재고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간략히 서술해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세상은 위기이자 또한 기회의 땅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티가 가진 상대주의적 특성을 경계하는 가운데, 진리가 해체된 이 시대의 외로움과 갈망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야말로 복음이 가장 필요한 시대라는 흔들림없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이 시대에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방법과 문화적 접점을 찾기 위해 최선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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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프 렌토르프(Rolf Rendtorff)의 『구약정경신학』은 『The Canonical Hebrew Bible : A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의 2부를 번역하여 출간한 책이다. 1부는 구약성서를 권별 흐름에 따라 정리해 놓았으며 2부는 주제별로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작품처럼 읽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원래 한 책으로 묶여있던 것이 저자의 의도이므로 이 책도 1부와의 연관성 속에서 읽을 때에 비로소 저자의 신학과 구약연구방법론의 독특한 맛과 멋을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약학 개관 수업을 통해 본서의 1, 2부를 함께 읽으며 거장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유익이었다.

먼저, 렌토르프가 취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론을 살펴보자. 렌토르프는 성서의 최종형태로서의 본문이 일차적 관심사와 연구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지난 세월을 지배해 왔던 성서해석 방법론인 ‘역사비평’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이 있다. 성서해석사에 있어서 역사비평의 출현은 성서연구에 큰 기여를 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성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배달되어온 책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상에서 형성되어온 책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과 그것이 자리했던 역사와의 관계들을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비평을 통해서 성서해석은 이전에 없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성서를 보다 풍성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해석사에 있어서 역사비평이 했던 독특한 기여였다. 이러한 역사비평은 이성을 무한히 신뢰하며 객관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시대에 매우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져 근대의 성서해석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곧 역사비평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성서 본문의 역사적 진정성에 대한 지나친 의심으로 인해서 본문을 심하게 자르고 재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시대의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결국 역사비평의 관심사는 성서본문(text)보다 본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상황(context)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비평은 당연히 ‘의심의 해석학’을 추구하며 그것은 본문의 해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성서 뒤에 숨겨져 있는 ‘진짜’ 역사를 밝혀내야 한다는 역사비평의 전제는 결국 성서를 최종본문의 형태로 완성시킨 편집자의 의도를 불순한 것으로 보고 편집이전의 ‘순수한’ 형태를 추적하고 본문을 편집이전의 요소들로 분해하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은 우리가 본문 너머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여도 우리가 반드시 진짜 역사를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진짜 역사를 발견했다 해도, - 물론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역사는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 우리의 최종적 관심사는 역사보다는 본문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문의 역사적 상황(context)을 주신 것이 아니라 본문(text) 자체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성서를 오늘날 주어진 최종형태의 본문으로 존중하게 하며, 또한 그 최종 형태가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우선적으로 묻게 한다. 여기에서 역사비평이 주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들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역사비평과 구분하여 '정경비평'이라고 한다. 롤프 렌토르프는 정경비평의 초석을 놓았다 할 수 있는 구약신학의 거장 폰 라트의 제자로서, 정경비평의 방법론을 계승하고 더 한층 발전시키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라고 한다.

나는 본 강의를 수강하기 전까지는 ‘정경비평’이나 ‘렌토르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렌토르프의 주장은 나에게 전혀 낮선 주장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내 관심사 중의 하나인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도 최근에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렌토르프의 정경비평적 방법론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의 톰 라이트(N. T. Wright)의 방법론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는 역사비평을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복음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전적으로 부정되고 완전히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재구성하는데까지 나아갔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버트 펑크, 도미니크 크로산, 마커스 보그 등이 활동했던 ‘예수 세미나’이다.

톰 라이트의 예수 세미나에 대한 비판은 매우 예리하며, 렌토르프의 문제의식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극단적인 의심의 해석학은 결국 성서본문에 대한 철저한 해체를 낳게 되고 그 이후의 재구성에 있어서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과 선호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객관적 역사를 복원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은 자신이 원하는 역사를 창조하여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는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이러한 극단적 역사비평을 적용한 학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상을 재구성해내었음을 성공적으로 보여줬다.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여 톰 라이트는 기존의 역사비평의 방법론을 적용하되 복음서의 최종형태를 존중하면서 연구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방법론의 철학적 전제를 ‘비판적 실재론’이라 부른다. 그리고 성서를 올바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의심의 해석학이 아닌 ‘사랑의 해석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사랑의 해석학’이란 성서 텍스트의 최종형태에 대한 존중와 신뢰를 가지고 성서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연구는 성공적으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으며 복음서 연구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그런데 이 책 『구약정경신학』을 통해서 구약학계에서 톰 라이트와 비슷한 문제의식과 신학적 접근법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렌토르프를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또한 그가 구약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매우 기뻤다. 이와 같이 구약학계와 신약학계 모두에서 역사비평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결국, 성서해석의 역사를 돌아보면, 최종본문이 존중되었던 역사비평 이전의 시대(전근대), 그리고 역사비평이 지배해 오던 근대의 시대를 지나 다시 최종본문이 강조되는 시대(탈근대)가 부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근대 이전의 성서문자주의 시대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성서의 최종형태를 존중하고 전체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동안 역사비평을 통해 축적되어온 수많은 통찰들이 정경비평에 기여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경비평에 입각한 성서연구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본서와 같이 성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들을 밝혀내고 서술하는 신학적 작업일 것이다. 역사비평에 입각해서도 구약신학을 체계적으로 세우는 작업이 물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비평의 관점에서는 성서의 최종본문에 대한 편집자의 정치적 의도 등을 문제 삼으며, 성서 본문들이 상반되는 관점을 가진 다양한 출처들에서 나와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 전체의 신학적 맥을 잡는 시도를 할 때에는 역사비평의 방식은 성서전체의 일관성과 응집력이 강조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어렵다는 약점을 가질 것이다.

그에 반해 렌토르프는 『구약정경신학』에서 구약성서 전체를 최종형태로 존중하면서 구약의 여러 본문들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주요주제들을 개관하고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구약성서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쓰여진 책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계시를 통일성있게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이 명백히 나타나는 매우 놀라운 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막 신학을 시작하는 초보신학도로서 여러 구약학자들을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방법론을 놓고 추론해 보자면 구약성서에 나타난 계시의 통일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학자가 이 렌토르프가 아닐까 생각된다.

렌토르프는 구약성서를 통일된 작품으로 우리에게 열어보여 준다. 예컨대, 구약이 계시적 통일성을 이루는데 모세오경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8개의 주제들 중에서 창조, 언약과 선택, 족장, 땅, 출애굽, 토라, 제의, 모세라는 8개의 주제가 모세오경에서 출현하고 자리를 잡는다. 그 후에는 - 오경에 언급되지 않은 다윗과 시온이라는 주제가 추가되긴 하지만 - 대부분 모세오경이 제시한 주제가 상호관련성을 맺으며 심화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구약성서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성서를 읽을 때에 대부분 책별로 읽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성서 앞뒤를 쉴새없이 넘나들며 관련구절을 찾아야 하는 방식의 책읽기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서구절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구약성서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나타내는 다양한 방식들 - 어떤 주제가 여기서 암시되고 저기서 구체화되고, 또 여기서 예언되고 저기서 성취되는 흐름들 - 을 발견하며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가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느끼게 된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책의 주제가 구약개관 - 이것이 1부의 주제이다 -이 아니라 구약신학인 것을 고려해 볼 때, 저자만의 독특한 신학적 강조점이 좀 더 나타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구약성서의 전반적인 흐름을 책별로 개관하여 준 후(1부), 구약성서에 나타난 주제들을 나열하여 제시하여 주는 것(2부)이 이 책의 목표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한 면에서는 이 책이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차피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객관성이라는 것이 철저히 담보되기는 어렵다고 볼 때, 독자가 이러한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학자의 관점과 성서가 상호교류하는 것을 접하며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다양한 통찰들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의 얕은 소견에서 보았을 때는, 저자가 구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별로 잘 분류하여 나열해주고 있지만 렌토르프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학적 강조점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월터 브루거만의 경우, 그의 저서에는 ‘약자를 압제하는 체제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항거’라는 신학적 강조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가 모세 전승과 다윗 전승을 긴장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고 다윗 전승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성서 전체의 계시적 통일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약점이 있는 것은 분명한 한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뚜렷한 신학적 강조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많은 통찰과 자극을 주고 있다. 이에 반해 렌토르프는 너무 건전하고 균형잡힌 관점을 견지하고자 하는 나머지 그것이 오히려 독자들이 깊이 사고하도록 자극하고 밀어붙이는 힘이 약하게 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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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옥의 탄생』은 아날학파의 거장 자크 르 고프가 연옥의 형성사를 연구하여 발표한 저서이다.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연옥의 탄생』은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중세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민중들의 삶, 그리고 여러 사상과 신앙의 교류들을 살펴보며 그 안에서 연옥의 개념이 싹트고 꽃피우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본서를 집필한 저자의 의도와 관심이 연옥사상의 신학적 정당성을 다루는 데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필자 역시 연옥 개념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보다는, 연옥에 대한 역사적 연구라는 본서의 주제에 맞게 본 서평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먼저 본서의 내용을 약술해 보도록 하겠다.

연옥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

저자는 본서의 제1부에서 고대근동과 유럽의 주요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내세 신앙을 개관하며 살펴본 후 거기에 이미 중세에 연옥사상이 형성되게 하는 씨앗이 될 만한 믿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대교 지혜문학과 예언서, 그리고 구약 외경과 위경들 안에도 천국과 지옥 외에 과도기적 형벌을 겪는 제3의 장소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연옥신앙을 배태한 보다 직접적인 씨앗들이 존재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는 세상에서 사함 받을 수 있는 죄가 있다는 논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과 지옥이 아닌 제3의 대기소에 대한 고중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바울이 피력하고 있는 ‘공력을 시험하는 불’ 사상을 들 수 있다. 이 본문은 천국으로 가기 전에 공력을 시험받고 정화되는 제3의 장소에 대한 암시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민간의 영역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많은 민담과 전설들이 형성되는 상상력의 원천이자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연옥 사상은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수많은 교부들과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통해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제2부에서는 초기의 ‘정화하는 불’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민간전승과 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연옥사상을 이루는 요소들이 점차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해갔던 4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연옥 사상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가다가 12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연옥이 시공간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명확히 정의되기 시작한다.

제3부에서는 이후 13세기에 스콜라 신학 안에서 연옥의 개념이 체계화되고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명확히 규정되고 법제화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와 같이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연옥 사상이 종합되어 녹아든 위대한 예술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 연옥사상의 문학적 종합이자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서는 『신곡』에 나타난 연옥 사상에 대한 해설에 마지막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중세에 연옥사상의 형성에 기여한 수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저자는 특별히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연옥 사상의 발전은 임박한 종말론의 퇴조로 인해 나타난 현세지향적 성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믿었기 때문에 개인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있는 시간적 공백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이 계속적으로 연기되어감에 따라 자연히 사람들 사이에는 죽음과 심판 사이의 기간에 영혼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크게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연옥 개념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연옥 형성사를 살펴보면 왜 연옥 사상이 12세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 12세기는 로마의 멸망 이후 쇠퇴를 경험하던 유럽사회가 다시 성장과 발전을 경험하기 시작한 번영의 시기였다. 이러한 번영의 시기에는 연옥사상이 흥왕하기에 알맞은 현세지향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연옥사상이 어떤 점에서 현세지향적 성향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는가? 연옥 사상의 요체는 죽음 이후에 망자가 사면가능한 죄들을 정화한 후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제3의 처소가 존재하며, 이 곳에 있는 망자들의 구원에 살아있는 자들이 기도와 보시, 미사 등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연옥은 구원의 기회를 죽음과 최후심판 사이로 연장하는 기능, 즉 구원에 있어서 ‘현세의 연장’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연옥의 그러한 측면이 현세에 안전하게 뿌리내린 채 천국의 희망을 붙잡기를 원했던 중세 말기 민중들의 갈망에 잘 맞아떨어지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연옥 사상을 형성한 사회적 요인의 또 다른 예로, 연옥사상이 교회가 민중들을 교화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유리한 점을 제공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연옥 사상을 통해 교회가 중세인들의 내세에까지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에 이 사상이 교회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법제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기독교신앙과 여러 민간전승과 전설들의 혼합, 거기에 구원을 향한 민중의 갈망과 민중을 도덕적으로 교화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교회의 필요들이 맞물려 돌아가며 연옥 교리는 형성되었고 중세교회사 속에 뚜렷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연구의 모범, 그리고 아날 학파

필자가 본서를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매우 광범위한 시대에 걸쳐 방대한 자료들을 조사하며 다양한 견해들을 비교 연구하고 있는 저자의 역사학자로서의 학문적 성실성이었다. 저자는 연옥 사상의 발아기부터 완성기까지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연구를 위해서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무려 천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타난 대부분의 연옥 관련 문헌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본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연옥이라는 연구 분야에서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에 일차적 가치가 있음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저자가 역사를 연구하는 태도와 방법론에서 역사연구의 한 전형과 모범을 배우게 되는 것에도 본서가 주는 추가적인 큰 유익이 있다는 역자의 평가에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또한 필자가 본서에 특히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점은 저자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민중들의 실제적 삶이 가지는 의미를 중시하고 그것을 역사적 사료로서 매우 가치있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저자가 속해 있는 학파의 학문적 경향성과 특징이기도 하다.

역사학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크 르 고프나 아날학파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크 르 고프는 역사학 분야에서 매우 큰 영향력과 입지를 가지고 있는 학파인 ‘아날학파’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계의 거두였다. 아날 학파는 기존 역사학자들이 위인이나 정치적 인물 위주로 역사를 이해하고 주요 정치적 사건의 연대 위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한 흐름이다. 이들은 정치적인 주요사건보다는 전체적인 사회 현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며, 위인이나 통치자, 정치인 등으로 대표되는 거물급 개인이 아니라 집단 전체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주요사건들의 연대를 통해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했던 기존의 역사학자들과 달리, 그 사회나 시대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를 파악하는 것을 더욱 중시하는 학파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역사연구에 있어서 ‘아날 학파’로서의 이러한 특징적인 접근법은 본서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만약 기존 역사학의 접근법대로 연옥 사상이 교회법이나 당대의 주요한 저술들 안에 정립되어 나타나는 시기를 기준으로 연옥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연옥의 형성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의 아날학파적 관점에서 나온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 생각은 본서에 명시적으로는 한두 번 정도 언급되지만, 사실은 본서 전체에 깔려있는 기본적인 전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연옥 사상은 중세 시대의 민중들이 교회와 관계맺으며 살아가던 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형성되어간 것이며, 오히려 당대의 교회법이나 신학적 저술들은 실제적 삶의 자리에서 형성되어간 이 사상을 뒤늦게 따라가며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는 13~14세기의 연옥에 대한 스콜라적 체계화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12세기까지 흘러오며 연옥 사상을 무르익게 했던 민중과 교회가 공유했던 사회문화적 정황들에게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아날학파가 기존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과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역사연구방법론은 본서가 필자에게 주었던 매우 큰 통찰이자 유익이었다. 필자가 그동안 접해왔던 세속역사와 교회사의 내용들을 돌아보면 정치적 인물들과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역사 기술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쉼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이 역사의 주목을 받고 기록되는 것은 불가능함이 분명하다. 그래서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역사가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만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하게 되어 있으며, 그 선택에서 이미 ‘해석’이 일어나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이 배제된 객관적 역사서술에 대한 생각은 근대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역사학이란 결국 ‘무엇을 역사로 볼 것인가’하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기존의 정치적 인물과 정치적 사건들 위주의 역사 기술은 사실 세상은 그처럼 주목받는 소수가 아닌 수많은 무명인들의 집합인 민중들에 의해 흘러간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다소 냉소적인 진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택과 집중을 하다보면 세상이 관심을 가질 만한 유명인물과 유명사건에 역사기록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누적된 사료들이 또 후대의 역사연구에 사용되면서 역사연구가 전개되어 나간다고 할 때, 역사가가 굳이 유명인과 유명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에 대한 기록이 가장 쉽게 확보 가능한 사료들인 바, 유명인과 유명사건에 대한 연대기적 정보는 어차피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와 같이 자연히 한쪽으로 쏠리게 되는 경향성이 있을 때에 균형을 잡으려면 의식적으로 반대쪽으로 기울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정치적 인물과 사건보다 일반 민중의 삶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연구해 갈 때, 우리는 그를 매우 균형잡힌 역사가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법으로 기술된 역사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균형 잡히고 실제 모습에 근접한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필자는 아날 학파의 거장 자크 르 고프가 쓴 『연옥의 탄생』을 통해서 앞으로의 역사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받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이들 학파가 가진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이 더욱 역사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연옥사상의 절정 - 단테의 『신곡』, 연옥편

또한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본서의 마지막 장에서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연옥 개념을 해설하는 부분이었다. 필자는 『신곡』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고전 중에 하나로서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는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그래서 여러 번 『신곡』 읽기에 도전하였으나, 서사시라는 익숙치 않은 장르로 인해,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상징들에 질려서 매번 읽기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연옥에 대해 풍성한 이해를 갖도록 돕는 본서를 읽은 후에, 본서의 말미에서 저자의 해설과 함께 『신곡』의 연옥편을 조금 맛보니 그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깨달음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신곡』이 고대와 중세의 수많은 인물들의 삶과 사상들이 녹아들어가 있는 고도의 상징문학이며, 독자가 더 많이 알수록 더욱 수많은 보화를 캐낼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본서를 읽은 후 단테의 『신곡』 읽기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볼 마음을 갖게 된 것이 필자가 개인적으로 얻은 또 하나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며 - 소감, 평가

끝으로 필자가 본서를 읽으며 정리해 본 연옥에 대한 개인적 소견을 밝히며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는 그동안 중세 교회의 연옥 사상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필자가 연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이라고는, 중세 교회는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다고 믿었으며 연옥에 있던 사람들이 형벌의 분량을 채우면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이해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러한 연옥 사상은 이신칭의를 핵심으로 하는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 개신교도인 필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에게 있어서 연옥 사상은 도대체 출처를 알 수 없는 뜬금없는 교리였고, 중세기에 기독교의 교리가 수많은 미신과 전설, 관습들과 혼합되던 시기에 형성된 무지의 산물 정도로 간주되고 있었다. 게다가 종교개혁만이 우리 개신교도들이 연옥 사상을 접하게 되는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맥락이었다는 점도 연옥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었던 것 같다. 잘 알다시피, 중세 말기에 면죄부 판매가 바로 이 연옥사상과 결합되어 종교개혁을 야기할 정도로 극도로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도 연옥 사상은 마치 부패한 중세 교회가 돈벌이를 위해 창안해낸 개념인 듯한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껏 필자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현대 가톨릭 교회가 전근대의 무지를 통과한 후에도 -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 여전히 연옥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왜 가톨릭 교회에서 연옥의 교리가 유지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엔 필자의 연옥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고 피상적이었다. 그래서 현대 가톨릭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언젠가 연옥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볼 기회가 생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과목을 통해 『연옥의 탄생』을 소개받고 읽게 된 것은 필자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유익이었다 하겠다.

물론 본서를 읽고 난 후라 하여 필자가 이제 연옥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중세인들이 연옥 사상을 지지해준다고 믿었던 성서구절들은 성서 전체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한두 구절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부풀려 받아들이게 된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여전히 연옥 교리를 받아들이기 힘들고 그럴 필요성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본서를 읽으며 얻게 된 수확은 연옥 사상이 단지 이교적 신앙에 영향을 받은 교회의 변질이거나 또는 - 더 나쁘게는 - 교회가 중세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한 왜곡된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데에 있다. 연옥 사상은 중세인들이 그들의 신앙 안에서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성찰해낸 결과물이며 나름 그들의 세계 안에서 나름의 개연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었다. 또한 연옥 사상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즉,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출생하자마자 죽은 원죄만 있는 영아와 수많은 죄를 저지른 극악한 범죄자를 지옥에서 같은 방식으로 벌하시겠는가 하는 신정론적인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연옥 사상을 형성했던 종교적 요인 중 하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에 의거하여, 그 하나님의 공의가 죽음 이후의 심판의 공정함으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날 수 있도록 교리적 정합성을 추구했던 중세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방식은 우리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연옥 형성사는 이러한 신비를 이성에 납득이 되도록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회문화적 정황과 맞물려 점점 거대해진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옥 형성사를 돌아보며 신앙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직 밝히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영역을 계속 신비로 남겨두는 겸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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