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객관적 연구와 주관적 묵상 중 어느 쪽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말씀의 문맥과 문학적 구조를 파악하고 시대적/문화적/신학적 배경지식 등을 동원하여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와닿는 한두구절에 집중하여 묵상하거나 상상력을 사용하여 말씀 안의 등장인물이 되어보는 등의 다소 '주관적'인 방식이다('과연 우리가 말씀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인식론 문제를 반론으로 제기하지는 마시라. 말씀을 보는 방법에 대한 스펙트럼 안에서의 상대적 개념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대체로 개혁주의 근처에 있는 보수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전자의 방식을 선호하며, 영성지도와 훈련을 강조하는 흐름에 있는 이들은 후자의 방식을 선호한다.

뭔소리를 하려고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읽던 책의 한 문단이 거슬려서다.

"렉시오 디비나 형식으로,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을 읽는 방식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학 시절에 했던 성경공부가 내게 대단히 유익하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 말씀의 위엄을 깊게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썼다(히 4:12).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성경 안에 죽어 있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의미다."
-- 엘리스 프라일링, <소그룹 영성훈련> 중에서


나는 이들의 주장에서 많이 등장하는 이런 식의 비교가 불편하다. 양자택일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반대편의 방식을 은근히 폄훼한다. 
위 인용문도 '렉시오 디비나'와 '상상력을 통한 말씀읽기(또는 말씀을 통한 관상기도)'는 자신을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로 이끈 반면, 귀납적 성경연구는 그런 관계로 이끌지 못했음을 암시하며 은근히 디스하고 있다(책을 보면 저자가 대학 시절에 했던 성경공부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귀납적 성경연구에 기반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내 경험으로는 두 방식을 병행해 갈 때 가장 큰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각각의 방식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영성훈련가들이 선호하는 말씀묵상방식은, 말씀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 묵상하는 이에게 '와닿는 것'과 '내면의 반응'을 더 중시한다.
따라서 자의적 해석과 지나친 주관성의 위험을 안고 있는데, 이것이 귀납적연구방식과 병행된다면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반대로 너무 연구의 방식만을 고집하게 되면, 성경을 하나님과 대화하는 통로이자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약화될 수 있는데, 렉시오 디비나나 말씀관상은 이러한 풍성한 체험의 장을 열어준다.

개혁주의자들은 영성가들의 성경묵상방식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영성가들은 렉치오디비나나 말씀관상이 마치 성경연구보다 더 진보한 단계인 것처럼 은근한 우월감을 뽐낸다.
그러나 두 가지 전통 모두 교회사 속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검증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시고 성장시켜 가시는 소중한 유산들이다.
그리고 그 둘을 개인의 신앙 안에서 잘 통합해 갈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깊이 있고 풍성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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