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간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니버의 인간관은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가능성’과 타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불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적절히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니버는 다른 한 쪽을 배제하여 인간을 가능적 존재거나 혹은 불가능적 존재로만 보려 하지 않고, “불가능한 가능성” 또는 “가능한 불가능성”이라는 역설적 술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니버가 보기에 정통주의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소홀히 하였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3장에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보편적 타락에 절대적인 강조는 인간 도덕성의 상대적인 차이를 무시해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만다. 따라서 “이것은 쉽게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무관심주의로 가는 경향이 있다.” 반면 그 반대쪽 극단에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했던 종교적 이상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이상을 사회윤리화하여 준수하게 한다면 그들이 속한 사회를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것이 월터 라우센부쉬로 대표되는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이었고 20세기 중후반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낙관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1,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의 인간 악의 심연을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들은 그들의 순진한 낙관론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

니버는 인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이러한 견해들의 부적합함을 인식하고,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소위 ‘기독교 현실주의’라 불리는 사회윤리와 정치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니버가 보기에 종교적 이상은 개인의 윤리성을 고양시키는데에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윤리의 영역에서 이러한 종교적 이상은 개인윤리에서처럼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한 집단 내부의 계층간의 관계나 또는 집단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역동을 고찰해 볼 때, 집단의 영역에서는 개인적 영역에서보다 이기심이나 비윤리성이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윤리의 영역에서는 사회에 속한 개인의 양심이나 종교적 감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제도나 규범, 강제력 등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니버는 계층 간 또는 집단 간의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정치적 기술을 통해서만 공동체를 더 질서있고 선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니버의 현실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니버의 사회윤리의 지향점은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다. 니버에 의하면, 기독교의 황금률과 같은 종교적 이상을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은 한 사회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사랑’의 근사치로서의 ‘정의’가 사회 안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오늘날에도 매우 적실성 있는 윤리적 관점과 틀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인류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극빈국과 부국 간의 빈부격차는 끝을 모르고 벌어지고 있다. 부국은 풍요 속에서 극도의 쾌락 추구로 자원을 낭비하고 있고 빈국에서는 기아와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또한 환경파괴와 전쟁의 위협은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는 어떠한 해답을 줄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에 의해 각성되고 회심한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통해 오늘날 당면해 있는 전세계적인 문제들을 점차 해결해가겠다는 이상은 현실성이 결여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교회사 속에서도 그와 같은 이상을 가지고 공동체 내에서 구현해보고자 했던 급진주의자들은 - 예컨대, 재세례파 - 대부분 사회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소종파(sect)로만 머물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소종파들이 기독교적 이상을 구현해가면서 세속사회에 귀감이 되고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한 방법일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으며 전세계가 직면한 거대한 문제를 해결해가기 위한 주된 접근법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세상이 더 악한 곳이 되는 것을 막고 정의가 진전되어져 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을 다루는 정치적 기술, 악을 제어하는 강제력 등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오늘날의 현실을 이해하고 해법을 제시하는데에 매우 적합하며 앞으로 더욱 적실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현실주의의 ‘현실성’ 추구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불의한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개혁적인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그 불의를 영속하는데 대한 합리적 명분으로 악용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기독교 현실주의에 입각한 정당전쟁론이 그 본래의 의도에서 이탈되어 미국이 중동의 패권과 석유이권을 장악하기 위해 중동전쟁을 일으키는데에 필요한 명분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많은 정치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기독교 현실주의가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실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우를 범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윤리적 비관주의로 귀결될 수 있고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사회의 윤리성 역시 약화되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윤리를 고양시키는데의 신앙의 역할, 그리고 집단윤리를 함양해가는데 필요한 사회, 정치적 역학은 상호공존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반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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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차드 니버는 그의 저서 『책임적 자아』에서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응답의 윤리(책임 윤리)라는 세가지 윤리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앞의 두 유형은 기존 윤리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른 것이고, 마지막 유형은 니버가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유형이라 할 수 있겠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간의 전통적인 구분은 윤리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보는냐에 달려 있다.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에서는 선(good)이 옳음(right)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신에게 선한 것을 추구하는 자이고 그 선을 증진시켜가는 것이 바로 옳은 것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는 만드는 존재(The maker)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빚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윤리에서는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는 철학적 시도들이 중요해진다. 플라톤의 ‘덕’,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등은 모두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목적론적 윤리의 장점은 인간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가치를 창출해내는 존재로 그림으로써 뚜렷한 목표의식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추동력을 가지게 함이라 할 수 있다. 인류사 속에서 인간이 지금까지 이루어온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원동력은 이 만드는 존재로서의 인간상의 긍정적인 발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의 약점은 바로 이 목적이라는 것을 규정해주는 더 높은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 때에 많은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윤리적 상대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반면,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에서는 반대로 옳음이 선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한다.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것을 지킴으로서 선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론적 윤리는 시민(man-the-citizen), 즉 법을 지키는 자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의무론적 윤리에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에게 주어진 궁극적 법률은 무엇인가?”하는 것이 된다. 의무론적 윤리의 장점은 각 개인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윤리적 명령에 순응함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무론적 윤리는 옳은 것이 이미 절대적 규범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적 선택과정에서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이 소외되는 율법주의가 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니버가 제안하는 응답의 윤리(responsible ethic)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니버는 인간을 응답하는 존재로 제안한다. 목적론적 윤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선’이고 의무론적 윤리의 가치가 ‘옳음’인 것에 비해 응답의 윤리는 ‘적합한 것(The fitting)’을 추구한다. 인간은 자기에게 과해진 행위 또는 사건에 대해 적합한 반응으로 응답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응답의 윤리가 던지는 질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What's going on in the world?)”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결국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What is God doing in the world?)”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적합한 응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해석’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은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바로 이 ‘해석된 응답(이것이 적합한 응답이다)’을 하는 존재이다.

응답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들을 절묘하게 극복하는 윤리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응답의 윤리에서는 인간의 윤리가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기 때문에 - 이러한 니버의 사상을 “급진적 유일신론(radical monotheism)”이라고 부른다 - 윤리적 실천이 뿌리내릴 수 있는 분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응답의 윤리는 목적론적 윤리가 빠지기 쉬운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복한다. 또한 응답의 윤리는 인간이 적합한 응답(the fitting response)을 스스로 찾아가는 창의적 노력의 자리를 열어주고 있으므로 인간의 선택이 배제된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는 의무론적 윤리의 한계를 극복한다 하겠다.

그러나 응답의 윤리가 가지는 가장 큰 한계는 ‘적합한 응답’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적합한 응답의 기초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이 기초가 명확한 규범적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을 때에 이것 역시 윤리적 상대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으며(목적론적 윤리로 회귀함), 반대로 그 적합함에 대한 기준이 절대적으로 제시된다면 이것은 결국 의무론적 윤리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응답의 윤리가 앞선 두 윤리유형과 차별성을 가진 유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적합한 응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적합한 응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에, 결국 이 응답의 윤리는 그 이론적 정합성에 비해서 그것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요약하면, ‘적합한 응답’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으로 인한 구체성의 결여가 응답의 윤리가 가지는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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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사회전략이다” 또는 “교회가 사회윤리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에서 기독교윤리를 추출해내어 사회정책이나 사회윤리에 이식하여 법제화하거나 제도화하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서의 윤리는 사회를 위한 보편윤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를 위한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 가령, 윌리몬과의 공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하우어워스는 주기도문의 주어가 ‘우리’라는 사실에서 두 가지 통찰을 이끌어낸다. 첫째는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고 ‘우리’라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은 개인경건을 위한 기도문이 아니고 공동체적 삶을 위한 기도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주기도문의 윤리적 함의대로 살아야 할 책임은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는 것 아니다. 교회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그것대로 살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 된다. 역시 윌리몬과 공저한 <십계명>을 이루는 중심사상도 동일하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회의 법이나 정책의 근거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에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교회는 세상과 차별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이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윤리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윤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기독교윤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가?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기독교윤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것은 세상에 복음의 진정성과 기독교윤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한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교회가 보여줄 때, 세상이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라 볼 수 있다. 가령, 교회가 평화을 이루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러한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폭력성을 깨닫게 된다. 교회가 인간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에 비추어 자신의 비인격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단지 기독교윤리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윤리로 자신의 존재가 형성된 사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우어워스는 이것을 ‘덕(virtue)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하우어워스에게 중요한 윤리적 의제는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덕의 윤리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narrative)이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차적으로 성서의 내러티브가 중요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성서의 내러티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그러한 사람을 형성해낸다.

이상과 같이 하우어워스의 “교회가 사회전략이다”라는 주장의 의미를 약술해보았다. 이야기, 덕과 인격, 공동체를 강조하는 하우어워스의 접근법은 포스트모던시대에 매우 적합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모던시대에는 객관성을 중시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검증을 중시했으나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포스트모던시대에는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독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메타내러티브는 죽었다’는 리오타르의 선언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해체주의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거대담론은 배척하고 지역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을 중시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선포와 논쟁, 변증 등의 근대적인 방식보다는 이야기 들려주기, 삶으로 보여주기 등의 방식으로 세상에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우어워스의 방법은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시대에 큰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우어워스가 그것이 포스트모던시대에 통할만한 전략이기 때문에 이러한 윤리적 접근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교회가 묵묵히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질 때에 세상이 교회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삶보다 말이 앞서고, 결국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인들을 통해 교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심지어 사회적 지탄까지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맥락 속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는 의제를 가지고 있는 하우어워스의 윤리적 전략은 한국교회가 꼭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우어워스의 주장이 지나치게 교회중심적이고 기독교윤리를 교회내부의 윤리로만 가두어놓는 분파주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매우 일리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독교 윤리가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막스 스택하우스이다. 나는 이 양 진영의 주장 중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윤리는 하우어워스의 주장대로 일차적으로 교회를 향해 주신 것임이 분명하고 또한 동시에 스택하우스의 주장처럼 사회적 에토스를 형성하여 세상을 더욱 윤리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에 따라 기독교윤리가 교회의 윤리임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기독교윤리에 사회적, 공적 가치를 형성해내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도덕적 해이와 스캔들로 한국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이러한 맥락에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함으로 다시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가 세상을 일깨우는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야말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윤리학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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