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터는 그의 저서 <가이아와 하느님>에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오늘날의 생태계의 위기상황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류터의 논지를 약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류터는 가부장제의 뿌리가 이원론적 세계관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고대 희랍인들에게서 시작되어 서구세계의 정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 세계이해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정신, 이성)과 신체로 나뉘어지고, 세계는 인간과 자연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의 사상에서 유래한 이 헬라식 이원론에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유형의 이원론을 ‘계층적 이원론’이라 한다. 가령, 계층적 이원론에 의하면 영혼은 육체보다 우월하다. 또한 이성은 감정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계층론적 이원론은 남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성적인 남성은 감정적인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형성한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전제에 의해 가부장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힘의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일이 먼저 일어났고 이것이 가부장적인 문화와 사회제도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계층적 이원론이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철학적인 합리화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계층적 이원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이며, 자연은 인간의 복지를 위해 이용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계층적 이원론은 남성의 여성 지배의 철학적 근간을 이루었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자연 지배와 착취의 철학적 근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류터를 비롯한 생태여성신학자(eco-feminist)들의 주장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생태여성신학자들이 히브리-기독교 전통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한가? 대다수의 생태여성신학자들은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남성적이며 가부장적인 모습을 띄고 있고 이것이 남성의 가부장적인 세계지배에 일조했다고 비판한다. 류터 역시 이 부분에서는 그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생태여성신학자들이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능성을 히브리-기독교 전통에서 찾는 것에 대해 비관적인 반면에, 류터는 히브리-기독교적 유산에 해당하는 계약 전통과 성례전 전통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생태여성신학자로서 류터가 가지는 특별한 위치라 할 수 있겠다.
린 화이트의 <The historical roots of ecological crisis> 이후로 히브리-기독교 세계관은 생태위기를 조장한 주범으로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류터도 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린 화이트의 주장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히브리-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헬라적인 이원론이 기독교세계와 만나면서 히브리 전통이 가진 고유의 관점을 왜곡시킨 상태에서 유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류터는 오히려 히브리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인격적이고 협력적인 상호돌봄의 관계를 이뤄낼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가령, 희년 사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히브리성서에 나타나는 희년의 비전은 인간의 죄악에 의해 발생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배와 착취, 폭력과 굴종,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남용과 착취, 수탈과 파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인 치유와 회복을 통하여 바로잡아야 하는 것으로 본다.
나 역시 히브리-기독교 세계관 안에 오늘날의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풍성한 유산들이 있음에 동의한다. 이 풍성한 유산을 우리의 사유와 실천의 토대로 삼을 때 우리는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의미있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히브리적인 인간이해는 육체를 멸시하고 영혼이나 이성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관점이 아니라 육체를 긍정하고 존중한다. 또한 이 세상을 부패하고 악한 것으로 보며 선하고 거룩한 타계로 구원받는 것을 지향하는 헬라적인 세계이해와 달리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 타락으로 인해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이 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선함과 아름다움의 요소가 남아있다. 그리고 히브리-기독교의 종말론적 소망은 창조세계의 선함이 완전히 회복되는 때를 소망한다. 류터가 히브리-기독교의 계약전통, 성례전전통에서 생태위기 극복의 희망을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류터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기독교종말론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류터는 기독교적인 생태윤리와 기독교의 묵시종말론적 소망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류터는 <가이아와 하느님> 3장 ‘세계 파괴의 종교적 이야기들’에서 기독교의 묵시종말론을 다룬다. 장의 제목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류터는 기독교의 묵시종말론적 소망을 생태위기 극복의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 묵시종말론적 소망이 지구와 인간이 공동운명체로 묶여 있음을 인식하고 지구를 책임있게 돌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이후에 오게 될 새로운 낙원을 기다리는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조장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류터의 연구에 참된 기독교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풍성한 의미들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타계지향적이고 구원 이외의 영역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한 태도를 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은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연구들이 성서가 말하는 종말과 구원은 이 세상은 사라져버리고 타계에서 영혼만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창조의 선함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개입과 회복을 말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 종말론은 헬라 이원론과 달리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한 종말론적인 윤리는 이 땅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안에서 살면서 청지기로서 피조세계를 책임감있게 돌보는 삶을 요청한다. 류터가 이러한 기독교종말론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계약, 성례전 전통과 잘 연결시켜 담아내었다면 생태위기 극복에 대한 좀 더 통전적이고 균형잡힌 기독교적 조망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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