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책표지에 쓰여 있는 이 짤막한 글은 리영희 선생의 글과 삶이 가지는 의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나는 그가 밝혀준 시대를 함께 지나와 그를 사상의 은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 세대의 사람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얼마전까지도 그에 대한 나의 지식이라고는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성을 ‘리’라고 표기하는 것에서 느꼈던 뭔가 낮설고 불온(?)한 이미지,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여러 책에서 수차례 언급되곤 했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왠지 간지나는 책 제목이 전부였다.

그러던 내가 리영희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유시민의 책 <청춘의 독서>와 조정래의 대하소설<한강>을 읽고 난 후부터였다. 그 두 책들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뤄낸 세대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후 나는 리영희 선생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평전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사상의 은사’라는 찬사와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아온 그였지만, 의외로 평전을 통해 알게 된 그는 단순히 ‘좌’로 규정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그의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과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 모두를 경계했으며 양자의 상호공존과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 불법, 타락, 빈부격차, 폭력, 범죄, 잔인, 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에요.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본태성 질병’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회주의의 인간중시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질병이 그 제도의 골수에까지 심화하여 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위험을 어느 정도의 선에서 예방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또 그렇기를 원한다면 사회주의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우선 지난 300~400년 사이에 인류의 발전을 이루어왔던 제도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화> 중에서.


그가 중국식 사회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정작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존과 보완에 있어서 그 기본틀은 자본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유신독재와 신군부시대의 권력이 리영희 선생을 그토록 탄압했던 것은 그의 사상 또는 이념이 유난히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보신을 위해 곡필을 일삼았던 어두운 시대에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재권력에게는 그의 ‘사상’보다 그의 ‘태도’가 더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불의에 대한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았던 용기와 기개.

언론인과 교수로서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정권과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태도로 살았기에 여러번 해직을 겪으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삶(특히 선생의 나이 예순 다섯에 처음으로 온수가 나오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아려왔다).

이러한 태도와 삶에서 나온 글이었기에 그의 글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었고 그는 시대의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었다. 각성이란 누군가를 배울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리영희를 통해 보건대, 스승이란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배우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그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 고병권의 글, <리영희 프리즘> 중에서.

 

평전을 통해 리영희 선생의 삶을 읽으며 자연스레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신앙이 없었지만 어둔 시대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진실을 증언하며 살아간 지식인이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제자로서 나 또한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을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책장을 넘기다 눈물이 핑돌게 만든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나온 리영희 선생이 아내 윤영자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시대의 우상과 맞서는 투사로 살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분 덕분이었으리라. 이름도 빛도 없이 모진 인생을 견디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선생 옆을 지켜온 분... 어쩌면 진정한 거인은 이 분이 아닐까. 이 여인이 너무 커보여서 한동안 이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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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신, 괴물>은 해체주의 이후의 철학과 신학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주요한 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커니의 삼부작 중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현대 철학의 핵심이슈인 '타자성'개념을 대중문화(영화 '에일리언', '지옥의 묵시록')와 문학('햄릿', 조이스의 '율리시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비극적 사건(911 테러)등을 두루 살피며 고찰하고, 타자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모색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의 주장을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커니는 우리가 근본주의로 귀결되는 극단적 실재론의 태도나 윤리적 응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도의 극단적 해체주의의 태도 중에서 양자택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별의 해석학'을 통한 제3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커니는 해체주의의 발흥 속에서 나타난 여러 논의들, 가령 '공포스러운 숭고(크리스테바), 기괴한 숭고(지젝)'  개념 속에 나타나는 윤리적 모호함의 흔적들에 우려를 표명한다. 이러한 우려는 그의 하이데거 비판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이데거적인 신성에서는 존재론적/미학적 차원이 윤리적 차원보다 우위를 점한다. 즉, 하이데거에게서 윤리는 미학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커니는 하이데거에서부터 최근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점차 윤리적 분별과 실천의 중요성과 당위성이 약화되어가는 미묘한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믿기로는 해체주의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가 종말론적 지평 위에 서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해체주의 이후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신은 근본주의적 폐쇄성을 띄는 닫힌 미래를 제시하는 '계시의 신'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신'이라고 본다(그래서 그의 대표작의 이름이 'The God who may be'이다).


이 같은 종말론적 왕국은 이것이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순환적 '사건', 종국적으로 회귀하는 동일한 기원의 사건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 너머"에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왕국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신이 지금까지 상상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종말론적 기대에는 윤리적 급박함이 있다. 만약 "가능한 도래"가 실제로 예측하지 못한 놀라움으로 밤중의 도둑처럼 온다면, 그것은 가장 약한 자의 얼굴을 통해 올 것이다. 즉 "이들 중 가장 작은 것들"의 울부짖음으로,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과부와 고아, 고뇌에 가득 찬 자, 주린 자의 얼굴을 통해 올 것이다. 이 같은 윤리적 요청에 대답하려면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이방인, 신, 괴물> p412



계몽주의 시대의 인식론의 특징은 실재/진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실재/진리와 분명히 접촉할 수 있고 오해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러한 자신만만한 '실재론'은 포스트모던시대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붕괴를 이끈 일련의 흐름을 "해체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해체주의가 계몽주의 시대의 오만과 독단을 해체하려다 진리 자체를 해체해버린 후, 이제 더이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해체주의 이후 세계는 인식론적 무지와 윤리적 모호함에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최근 학문의 여러 영역에서 포스트모던의 극단을 찍고 다시 중간지대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가령, '비판적 실재론').

그러나 비록 커니가 판별의 해석학을 강조하고 선악은 윤리적 기준으로 다루어야지 미학적으로 모호하게 악의 심각성을 흐리면 안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의 인식론의 위치는 분명 비판적 실재론자보다는 해체주의자에 더 가깝다. 그는 해체주의로 분류되는 학자군 안에서 약간의 중도회귀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 정도로 볼 수 있을거 같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커니는 해체주의자가 아니라는 반론도 가능할지 모르나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디테일은 식별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수록 큰 차이도 점점 더 작아보이는 법이다. 나의 신학적 스탠스에서 볼 때 커니와 여타 더 강고한 해체주의자들(데리다, 카푸토, 리오타르 등) 간의 차이는 새누리당에서 보기에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마땅한 예를 못 찾았을 뿐이다. 새누리당... 나는 그 정도의 꼴통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리처드 커니를 알게 된 것은 나로 하여금 해체주의자들 안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해준 신선한 만남이었다. 해체주의 안에 보여지는 다양성들을 보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단순화된 이해도 어느 정도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식론에 있어서 해체주의와 같은 극단적 관점주의가 나의 견해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그래도 온건한 실재론자로서 이러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책을 통한 소통을 시도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듯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타자성의 철학'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졌다. 이제 다음은... 레비나스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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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TEPS를 공부하며 미드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후 지금까지 적지않은 미드를 보았지만, 영어가 정말 늘었는지는 의문이다^^;

암튼, 미드계의 여러 걸작들을 지나 내가 최근 다다른 곳은 막장드라마로 유명한 "Glee"다.

나이 서른넷에 하이틴 합창드라마가 웬말인가 싶지만, 난 고딩들 영어니 쉽고 잘 들릴 줄 알았을 뿐이고...(그런데 웬걸.. 얘네들 slang 엄청 쓴다. 그래서 실패!ㅠㅠ)


그런데 이 드라마.. 아주 묘한 매력이 있다.

일단 명성대로 줄거리의 유치함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간간히 나오는 멋진 노래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에 집어치웠을 거다.

사실, 제작자가 아무리 뻔뻔해도 그렇지, 아무런 믿는 구석없이 저 정도의 유치한 플롯을 시청자들에게 디밀수는 없다고 본다. Glee에서는 그 믿는 구석이 '음악'과 '퍼포먼스'다.

알고보니 글리는 스토리에 음악을 맞추는게 아니라 음악을 먼저 정하고 거기에 스토리를 짜맞추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니 완성도 높은 스토리가 나오기는 어려울수밖에 없다. 그것을 사전에 충분히 시청자들에게 인지시켜서 스토리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대신 음악과 퍼포먼스를 기대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

그 전략은 성공적이었던 듯 하다. 글리의 믿는 구석인 '음악'과 '퍼포먼스'는 엉성한 스토리를 커버하고도 남을만큼 훌륭하다.

그런데 내 생각에 글리의 더 큰 강점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그 유치찬란한 '이야기'가 의외로 깊은 울림을 준다는 데 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 효과는 더욱 강력하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루저'들이 글리 클럽에 모였다. 그들은 거기서 윌 슈스터라는 좋은 리더를 만난다. 그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선생님이다. 외모와 능력으로 서로를 평가하여 철저히 서열화시키는 고교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글리 클럽 안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를 친구로 대하는 법을 배워간다. 음악을 통해서 그들은 점차 '진짜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스토리 안에서 글리는 우리 시대 십대들의 모습을 잘 담아내 보여주고 있다.

또래집단의 반응에 매여 살아가는 삶, 소외에 대한 두려움와 외로움, 진실한 우정에 대한 갈증과 소속에 대한 갈망, 참된 스승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부모의 모습까지...(극중 좋은 부모의 모델인 커트의 아버지는 정말 최고다. 나올 때마다 가슴 찡한 명장면을 마구 쏟아내주신다).

이와 같이 글리는 십대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삶과 가치관, 열망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음악과 함께, 나는 이것이 이 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본다.


그래서인지 글리를 보면서 지미 롱의 <새로운 청년사역이 온다(원제: Emerging Hope)>가 떠올랐다. 글리에는 그 책에서 지미 롱이 말했던 밀레니엄 세대의 모습이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그 책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글리를 보며 꿈꾸고 도전받았다. 그리고 소망하게 되었다. 교회가 우리 시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글리 클럽 같은 공동체가 되어줄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 세대가 그들에게 윌 슈스터 같은 진실한 멘토가 되어 줄 수 있기를...




글리 시즌1 명장면 중 하나!(최고의 장면이라기엔 커트의 아버지가 너무 강력하다...^^;)

글리 클럽 해체를 앞두고, 학생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윌 선생님에게 부르는 노래...

"To Sir With Love"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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