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성>심포지움 주제발제 세번째 시간. 

".....목회자의 특수한 위치는 성적 탈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다음의 네가지 조건들, 즉 “권력”(power), “관계의 고립”(isolation), “고지식함 혹은 순진함”(naivete), 그리고 “슈퍼비전의 부재”(lack of supervision)의 '완벽한' 조합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이 가진 권력의 행사를 감독해 줄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는 것은 목회사역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성적 탈선의 배경이 되고 있다. 목회 신학자 Margaret Kornfeld에 따르면 목회자의 고립이 단순히 도움을 줄 있는 외부의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상황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말한다. 쉴 수 

없는 업무로 인하여 탈진되는 것은 곧 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신체적, 심리적, 영적 필요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쉼없이 기도하고 설교하고 상담하면서 정작 자신의 양육은 등한시될 때 목회자의 탈진과 성적 탈선은 너무나도 쉽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성적 탈선이 평신도에 대한 권력의 남용이라 한다면 탈진은 인식되지 않은 자기학대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주는 사람들이다. 주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남을 위해 전적으로 쓰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동시에 그와 반대로 많은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의 요청을 어떤 이유로든 거절하거나 자신이 당연한 쉼이나 특권을 누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죄의식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런 외적 환경의 압력은 자기 학대와 자기 결핍을 일으키고, 무의식적인 그에 대한 보상의식을 자극한다. 초창기에 그렇게 인격적이던 사역자가 담임목회자가 되고 더 많은 책임을 맡게 되면서 권위의식으로 신속하게 전환을 일으킨다. 상담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목회자는 무의식 가운데 심지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불만스러웠던 욕구의 충족까지 덩달아 얻으려는 강렬한 유혹에 빠지게 된다. "


---- 하재성 교수 발표 중에서



어제 기윤실에서 주최한 <목회자와 성>심포지움의 발제 일부(위 글)를 페친의 담벼락에서 읽고 그에 대한 단상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재성 교수(고신대 신대원 목회상담학)는 목회자는 성적 탈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네 가지 조건, "권력"(power), "관계의 고립"(isolation), "고지식함 혹은 순진함"(naivete), 그리고 "슈퍼비전의 부재"(lack of supervision)의 완벽한 조합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비록 사역 8년차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이지만 제 짧은 사역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이 분석은 구구절절 옳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수차례 지적되어도 실제로 필드에서 성적 탈선에 취약한 이러한 사역환경과 풍토를 바꾸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이슈에 대한 반응을 보면 목회자든 평신도든 대부분 개인적 적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들은 '두렵구나. 누가 능히 서리요. 은혜로만 선다네'류의 은혜로운(?) 적용에 그치기 십상입니다(대부분 '은혜'로 마무리하고 시스템이나 환경을 건드리지 않는 목회자들의 적용방식은 거의 모든 이슈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평신도 편에서 '우리 목사님/전도사님/간사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는 것이나 '너희 목회자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어! 조심해!'류의 불신과 적대감도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발제자가 제시한, 목회자를 성적 탈선에 취약하게 만드는 네 가지 조건을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바꿔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 네가지 조건 중 특히 제가 주목하는 것은 "권력"과 "관계의 고립"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설정에서 비롯되는, 상호연관되어 있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명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의 어두운 면으로 '목회자의 우상화'를 꼽았습니다. 복음주의권 교회(수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그들이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는 스테레오 타입을 무의식/의식적으로 투사하고 요구합니다. 그 공동체의 영적 성향에 따라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본'이 될 수도 있고 '탁월한 인격'이 될 수도 '신령한 은사와 영적인 능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에 자신을 맞추어 가거나 또는 더욱 적극적으로 '인품좋고 신령하고 능력있는 목회자'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권위와 존경을 얻어갑니다. 사실상 이것이 목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분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범함'으로 얻게된 권위와 존경으로 인해 목회자는 일상 속의 자신의 '평범함'을 성도들에게 노출하기가 점점 어렵게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이상적인 모델이 되기 위해 경건과 능력을 과도하게 추구하여 일상이 왜곡되거나, 또는 성도들과 거리를 두어 일상을 가리고 신비주의전략으로 목회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우상화'에 가까운 존경과 '절대권력'을 주지만, 목회자는 성도에게서 '고립'됩니다(여기가 '권력'과 '관계의 고립'이 상호연관되어 있는 지점입니다). 여기에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겪고 있는 "슈퍼비전의 부재"가 맞물려서 목회자들을 극도의 외로움으로 몰아넣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저는 이러한 목회환경의 개선 없이는 이 문제를 결코 풀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 목회자의 위상과 권한, 책임과 역할에 대한 개념이 철저하게 재설정되어야 합니다. '만인제사장직'을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요구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우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탈권위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2. 교회의 대형화를 지양해야 합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목회자의 우상화와 절대권력, 관계의 고립에 가장 취약한 구조입니다.

얼마전 기사화된 전병욱 목사와 20년간 함께 일했던 한 집사의 인터뷰에 '전목사가 신반포교회에 있던 사역초기부터 여성 비하나 성희롱발언을 자주 해왔으나 그 때는 주위에서 화를 내며 따지기도 했었지만, 대형교회 목회자가 된 후로는 일년에 한 번 대화하기도 어려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대형교회 목회자와 성문제 사이의 논리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목회자와 성도간의 인격적 관계의 거리는 멀어지며 성도들이 목회자의 윤리적 이슈에 대해 피드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세대의 교회는 목사와 성도가 자연스럽게 삶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일상의 '평범함'을 노출할 수 있는 작은 단위의 공동체 운동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올해로 8년차인 청년사역자입니다. 현재 신대원에 다니고 있고 어쩌면 훗날에 목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든 안 되든 간에,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제 또래의 친구/형/동생들 중에 목사냄새보다 사람냄새가 더 나는 목사, 카리스마나 신비주의 따위는 그거 먹는거냐고 비웃으며 작은 공동체에서 성도들과 어울려 놀고 울고 웃으며 행복하게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에게 '외로움'은 반드시 져야만 할 십자가가 아닙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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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나의 대학선배이고 한때 아내가 일했던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내가 저자를 처음 만난 건 대략 15년전 저자가 IVF모임에 강의를 하러 왔을 때였다. 그 때 저자는 강의 초반에 주제에서 이탈한 후 방대한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끝내 본주제로 돌아오지 못하고 강의를 끝내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매우 훌륭한, 그러나 예고된 것과 전혀 다른 주제의 강의를 들었었다. 

그 때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저렇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가진 똑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간 나올줄 알았던 그의 첫번째 책이 드디어 나왔다. 나꼼수현상에 대해 신학적/인문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한국사회를 강타한 나꼼수 신드롬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크게 셋으로 나뉠 수 있다. '무관심하기', '왠지 꺼림칙(?)한 마음으로 몰래 듣기', '나꼼수가 놓인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미시윤리적(가령, "욕하면 나빠", "비꼬면 나빠")으로 비판하며 거부하기'. 이러한 상황에서 '나꼼수현상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이라는 불모지를 개척한 책이 나왔음이 매우 반갑다.

저자는 나꼼수현상과 그에 대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반응을 분석하는데에 있어서,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 니체의 아폴로-디오니소스 이론 등의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활용한다. 그 분석은 매우 적절하며 흥미진진하다. 한번 잡으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흡입력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신학적/인문학적 소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다양한 입장이 각축을 벌이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문제에 대해 어떻게 찬성/반대, 참여/거리두기를 결정할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단순한 미시윤리 적용이 아닌 깊은 신학적/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판단해가는 것에 대한 하나의 탁월한 모델을 볼 수 있다. 
특히 인문학이 현학적인 사람들의 지적유희라고 생각하며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고 자극을 받고 고민과 토론이 활발히 일어나면 좋겠다.

그래서 나꼼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냐고? 궁금하면 꼭 읽어보시길!!^^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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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을 완결지을 새도 없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책은 노무현재단과 유시민이 그의 생전의 여러 기록들과 그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해서 편집하여 완성한 책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 책은 자서전의 엄밀한 정의를 충족시키에는 부족함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노무현 자서전으로 손색이 없는 이유가 있다면 이 책이 그 분을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대통령 노무현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화끈한 진보대통령이 되어주기를 바랬던,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의 바램과 달리 그는 결국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에게 비난당하고 외면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결국 그 길을 가기까지의 그의 선택과 행보에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고뇌가 담겨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이 그 고민과 고뇌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피해 입을 약자들로 인해 마음 아파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선택에 대해 100% 확신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았다. 그는 때로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후회했다. 또한 그는 비난당할까봐 두려워했고 혼란해했고 그래서 변명도 했다. 또한 그는 상처받았고 서운해했고 외로워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이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이 책은 그를 닮아 가식없이 참 솔직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가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특히 부패한 수구언론과의 외로운 싸움이 그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고인이 헤치고 나아가려 몸부림쳤던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언론은, 우리의 정치판은 평범한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했던 보통사람이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퇴임 후 살기 원했던 농민과 시민운동가로서의 소박한 삶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정도 두께의 자서전 한권이 충분히 더 나올만큼 가치있는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퇴임 이후의 그의 삶과 계획은 나에게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었다). 나는 이 책이 그 지점에서 그렇게 급작스럽고 허무하게 끝나버려야만 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훗날 우리의 역사가 '대통령 노무현'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 역시 대통령으로서 그가 했던 선택과 결정들로 인해 실망했던 적도 많았다. 그는 결코 완벽한 대통령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도 추악한 대통령을 많이 배출했던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고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후대에게 우리 시대도 이런 대통령을 가졌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인간 노무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대통령 노무현’보다는 '인간 노무현'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인간 노무현의 꿈과 그 걸음걸음을 응원했고 존경해왔다. 책을 읽고 나니 새삼 그가 많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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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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