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성>심포지움 주제발제 세번째 시간.
".....목회자의 특수한 위치는 성적 탈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다음의 네가지 조건들, 즉 “권력”(power), “관계의 고립”(isolation), “고지식함 혹은 순진함”(naivete), 그리고 “슈퍼비전의 부재”(lack of supervision)의 '완벽한' 조합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이 가진 권력의 행사를 감독해 줄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는 것은 목회사역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성적 탈선의 배경이 되고 있다. 목회 신학자 Margaret Kornfeld에 따르면 목회자의 고립이 단순히 도움을 줄 있는 외부의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상황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말한다. 쉴 수
---- 하재성 교수 발표 중에서
어제 기윤실에서 주최한 <목회자와 성>심포지움의 발제 일부(위 글)를 페친의 담벼락에서 읽고 그에 대한 단상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재성 교수(고신대 신대원 목회상담학)는 목회자는 성적 탈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네 가지 조건, "권력"(power), "관계의 고립"(isolation), "고지식함 혹은 순진함"(naivete), 그리고 "슈퍼비전의 부재"(lack of supervision)의 완벽한 조합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비록 사역 8년차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이지만 제 짧은 사역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이 분석은 구구절절 옳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수차례 지적되어도 실제로 필드에서 성적 탈선에 취약한 이러한 사역환경과 풍토를 바꾸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이슈에 대한 반응을 보면 목회자든 평신도든 대부분 개인적 적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들은 '두렵구나. 누가 능히 서리요. 은혜로만 선다네'류의 은혜로운(?) 적용에 그치기 십상입니다(대부분 '은혜'로 마무리하고 시스템이나 환경을 건드리지 않는 목회자들의 적용방식은 거의 모든 이슈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평신도 편에서 '우리 목사님/전도사님/간사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는 것이나 '너희 목회자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어! 조심해!'류의 불신과 적대감도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발제자가 제시한, 목회자를 성적 탈선에 취약하게 만드는 네 가지 조건을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바꿔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 네가지 조건 중 특히 제가 주목하는 것은 "권력"과 "관계의 고립"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설정에서 비롯되는, 상호연관되어 있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명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의 어두운 면으로 '목회자의 우상화'를 꼽았습니다. 복음주의권 교회(수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그들이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는 스테레오 타입을 무의식/의식적으로 투사하고 요구합니다. 그 공동체의 영적 성향에 따라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본'이 될 수도 있고 '탁월한 인격'이 될 수도 '신령한 은사와 영적인 능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에 자신을 맞추어 가거나 또는 더욱 적극적으로 '인품좋고 신령하고 능력있는 목회자'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권위와 존경을 얻어갑니다. 사실상 이것이 목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분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범함'으로 얻게된 권위와 존경으로 인해 목회자는 일상 속의 자신의 '평범함'을 성도들에게 노출하기가 점점 어렵게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이상적인 모델이 되기 위해 경건과 능력을 과도하게 추구하여 일상이 왜곡되거나, 또는 성도들과 거리를 두어 일상을 가리고 신비주의전략으로 목회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우상화'에 가까운 존경과 '절대권력'을 주지만, 목회자는 성도에게서 '고립'됩니다(여기가 '권력'과 '관계의 고립'이 상호연관되어 있는 지점입니다). 여기에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겪고 있는 "슈퍼비전의 부재"가 맞물려서 목회자들을 극도의 외로움으로 몰아넣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저는 이러한 목회환경의 개선 없이는 이 문제를 결코 풀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 목회자의 위상과 권한, 책임과 역할에 대한 개념이 철저하게 재설정되어야 합니다. '만인제사장직'을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요구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우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탈권위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2. 교회의 대형화를 지양해야 합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목회자의 우상화와 절대권력, 관계의 고립에 가장 취약한 구조입니다.
얼마전 기사화된 전병욱 목사와 20년간 함께 일했던 한 집사의 인터뷰에 '전목사가 신반포교회에 있던 사역초기부터 여성 비하나 성희롱발언을 자주 해왔으나 그 때는 주위에서 화를 내며 따지기도 했었지만, 대형교회 목회자가 된 후로는 일년에 한 번 대화하기도 어려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대형교회 목회자와 성문제 사이의 논리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목회자와 성도간의 인격적 관계의 거리는 멀어지며 성도들이 목회자의 윤리적 이슈에 대해 피드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세대의 교회는 목사와 성도가 자연스럽게 삶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일상의 '평범함'을 노출할 수 있는 작은 단위의 공동체 운동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올해로 8년차인 청년사역자입니다. 현재 신대원에 다니고 있고 어쩌면 훗날에 목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든 안 되든 간에,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제 또래의 친구/형/동생들 중에 목사냄새보다 사람냄새가 더 나는 목사, 카리스마나 신비주의 따위는 그거 먹는거냐고 비웃으며 작은 공동체에서 성도들과 어울려 놀고 울고 웃으며 행복하게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에게 '외로움'은 반드시 져야만 할 십자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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