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의 '새관점'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 사이에 있었던 칭의논쟁은 워낙 존 파이퍼가 목회자와 저술가로서 대중적 지명도가 높기 때문에, 새관점을 둘러싼 논쟁이 대중들의 주목을 끌게 하는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성서주해의 엄밀함과 전문성에 있어서 애초부터 공정한 게임이 되기 힘들었던, 이 성서신학자와 목회자 사이의 논쟁은 사실상 존 파이퍼의 완패로 끝이 났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존 파이퍼는 끝판대장이 아니었으니, 새관점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서의 비판을 가장 설득력있게 전개할 수 있는 이는 바로 이 분, 김세윤 박사일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신약학자로서, 현재 바울신학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서 새관점 학파에 맞서 논의의 최전선에서 가장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이 책은 김세윤 박사가 2012년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에서 "칭의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을 책으로 엮어 출간한 것입니다.
새관점 학파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저자가 주된 논쟁의 상대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톰 라이트입니다(새관점 학파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의 전반부에서, 그는 먼저 제임스 던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신 이후로 줄곧 톰 라이트의 주장을 상대합니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책을 읽은 이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저 역시 새관점과 옛관점이 서로 건강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수정, 발전되어가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톰 라이트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원제: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에서 전통적 칭의론을 자신의 관점 안에서 포괄해보려는 노력을 보여줬다면, 이 책에서 김세윤 박사 역시 새관점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을 반박하면서도 새관점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새롭게 발견하게 된 통찰들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폭이 생각보다 꽤 넓습니다. 이 정도의 대가들이 학문적 논쟁을 하면서 논적의 주장을 참고하여 자신의 입장을 수정해간다는 것은, 겸손하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훌륭한 성품의 대학자들과 동시대에 살면서 그들의 치열한 탐구와 논쟁의 결과를 즉시 접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세윤 박사는 톰 라이트가 샌더스를 이어받아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이해한 후, 그에 따라 칭의를 법정적 의미를 가진 구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교회론적 의미로 읽는 것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조목조목 매우 수긍이 갔습니다. 제가 그동안 톰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찜찜하게 느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짚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매우 놀라웠던 것은, 톰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칭의는 구원론인가 교회론인가’하는 이슈보다 더 거센 저항과 신랄한 비판에 직면하리라 생각되었던 ‘칭의는 미래에 얻을 의로움에 대한 현재적 선언’이라는 주장을 김세윤 박사가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꽤 깊숙이 수용해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입장이라면 김세윤 박사는 톰 라이트의 논적이 아니라 사실상 우군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 반펠라기우스주의의 현대판 버전으로 간주될 소지가 다분했던 톰 라이트의 논리보다 오히려 김세윤 박사가 제시하고 있는 설명이 훨씬 더 명료하며 설득력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칭의의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의미를 함께 강조하며 옛관점과 새관점을 함께 아우릅니다. 실용적 이유에서 비롯된 양시론적인 절충주의가 아니라 각각의 명확한 성서주해상의 근거를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또한 칭의와 성화를 같은 의미를 다른 강조점으로 표현한 두 개의 그림 언어로 보면서 사실상의 동의어라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전통적 입장의 ‘칭의–성화–영화’의 구도가 아닌, ‘칭의(=성화)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도를 제안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의 칭의론은 옛관점과 새관점을 모두 담을만큼 폭이 넓으며, 윤리와 분리된 왜곡된 칭의론을 극복할만한 힘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 책은 새관점을 비판하는 앞부분이 아니라 저자가 칭의와 성화의 의미를 풀어내는 후반부가 백미입니다.
새관점 비판만 다루는 책인 줄 알고 관심자만 읽으면 되겠거니 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새관점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에 관심이 없는 분은 2장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저자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뛰어넘는 책입니다. 구원, 칭의, 성화의 의미,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 대해 매우 깊은 통찰을 주는 책입니다.
경건하게 두 손 모아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