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스티븐 커트는 영국 성공회 목회자다. 이 책은 저자가 톰 라이트의 신학을 지역 교회에 적용하여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전반부는 톰 라이트의 신학이 교회에 어떠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고 보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 그리고 톰 라이트의 신학에 대한 키워드 중심의 간단요약이 있다. 물론 단순화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 요약이 매우 훌륭하다. 이 요약을 통해 톰 라이트의 신학에 입문하기는 무리지만, 어느 정도 톰 라이트의 신학을 접해본 사람이 그의 신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본론이라 할 수 있는 '톰 라이트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기'는 짧아서 다소 아쉬웠다. 더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시간관계상 서둘러 마쳐버린 강의를 들은 느낌이다. 그만큼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건강한 신학이 목회에 건강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책이다.
신학과 목회가 따로 가는 교회의 현실을 극복해가기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겠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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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기독교는 오랫동안 세상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창조 vs 진화"의 구도로만 파악해 왔다. 
근래에 우종학 교수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와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 그리고 맥그라스의 저작 등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세상의 기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지에 창조과학회의 주장 이외의 것들이 있음이 그나마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중이지만, 관심자가 아닌 한 여전히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미약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조과학회의 주장의 진위보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정서적인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택일을 강요하는 듯한 이러한 구도는 옳지 않다. 이 책의 저자들이 문제제기하듯이 그러한 구도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과학을 공부하다가 신앙을 떠나도록 만들기도 하며, 또한 재능있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자신의 학문이 신앙과 공존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과학의 영역에 헌신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독교적 답변이 존재한다. 그 중 한 이론에 대해서 확신을 담아 전달하는 좋은 책들이 많이 있지만, 세상의 기원에 대한 여러 기독교적 주장들의 지형도를 펼쳐보여주며 각 주장의 장단점들을 독자 스스로 비교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입문서의 필요성이 매우 크다.
이 책 <오리진>은 바로 그러한 책이다. 이 책은 적어도 지금까지 제시된 세상의 기원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답변을 개략하고 있다. 이 책이 주는 정도의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정리의 기회가 될 것이며, 창조과학회의 주장 정도만 알아온 사람들에게는 큰 인식의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은 이 책이 세상의 기원의 문제에 대한 이론적 정리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있는데 그 관점이 매우 건전하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좋은 책이다. 
관심자의 정리용으로도 그간 비관심자였던 이의 입문용으로 매우 추천할만하다.



신학블록버스터 7화에서 소개한 책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IK11FApjfs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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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북과 블로그에서 주로 하는 짓 중 하나가 책 소개다. 

책 좀 읽는다고 으스댈 나이는 오래전에 지났고 사실 이제는 책 좀 읽으면서도 삶이 바뀌지 않는 걸 부끄러워할 나이다.
그런데도 졸린 눈을 부릅뜨고 지금 이 시간에 오늘 읽은 책을 페북과 블로그에 올리고 있는 이 짓을 나는 도대체 왜 하고 있는걸까?
그건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책의 힘을 믿기 때문일 거다.
책이 인간의 성숙을 '보장'할 수는 없어도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가장 힘있게 보여주는 책을 만났다.
사실 이 책에 대해 감히 어떤 말도 보태기 어렵다.
읽는 내내 많이 울었고 가슴이 아렸다.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깊이 회개했다. 
위로받았고 새 힘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책으로 인해 앞으로 내가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조금씩 변화되어 갈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한 권으로 책으로 인해...

더 이상의 설명과 미사여구가 쓸데없다.
내 인생 최고의 책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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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엇비슷한 제목의 수많은 신앙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책 역시 처음엔 굳이 이 책을 왜 나의 독서 리스트에 올려야 하는지 딱히 이유를 찾기 어려운 그런 책들 중 하나로 보였는데... 책의 제목보다 부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약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야훼 하나님을 신약의 예수님에 비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분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에 일조하는 구약 본문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많은 신앙서적들에서 이 문제를 지나가며 잠깐씩 다루는 것을 본 적 있지만, 다소 아카데믹한 신학서적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신앙서적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이 정도면 존재가치 충분하고 읽을 이유도 충분하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몇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문제 제기, 성경 해석, 설명의 난이도, 유머감각 모두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성도들이 제기하는 신학적 난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준비로 사역자에게도 매우 유용할 책이지만, 의문을 가진 당사자가 성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직접 읽고 고민해보기를 권할 수 있을만큼 쉽고 명쾌하다(히브리어에 대한 해설이 간간히 나오지만 히브리어를 몰라도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성경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마음에 묻어두고 사는 이들을 모아서 이 책을 교재로 몇주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여러 모로 활용가치가 높은 블링블링 완소아이템이다.
요샌 막연하고 지당하신 말씀들 늘어놓는 책 말고 이렇게 타겟이 명확한 책이 좋더라.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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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책을 집어들었다.

원래 달라스 윌라드의 열렬한 팬이었으나 이 책을 통해 그를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 워낙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지라, 이에 대한 가르침은 듣는 이들의 삶과 의사결정, 가치관, 신학에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 영역이야말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건전한 신학 안에 서 있는 이의 가이드가 절실히 필요하다. 
달라스 윌라드의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러 혼탁한 지류들 속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가르침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래서 기도하고, 이 내용이 필요한 누군가가 떠오르고, 그래서 그를 위해 중보하고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다소 건조하다. 다양한 사례가 담겨 있어 읽기 쉬운 간증집이 아니라 '원리'를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이례적인 간증들(도전이 되기보다는 보통 주눅이 들게 하고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의 향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바른 '원리'와 '태도'를 습득하는 것이라면, 아직까지 내가 읽은 책들 중에는 이 책을 뛰어넘을 만한 책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강추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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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의 자서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레슬리 뉴비긴은 인도 선교사로 살다가 은퇴하여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간 비서구권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왔던 서구사회가 오히려 선교지가 되어버린 상황에 직면하여 충격을 받게 된다. 그 후 레슬리 뉴비긴은 근대 이후의 서구사회의 특징에 대해 분석해내는 일과 이렇게 다원주의화된 서구사회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이슈에 깊이 천착하게 된다. <서구 기독교의 위기>,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과 같은 불후의 명저들은 이 기간 레슬리 뉴비긴의 사유와 연구의 결실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레슬리 뉴비긴은 포스트모던시대의 복음전도와 선교에 대해 고민할 때에 리처드 보캄과 함께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선교학자였다.

우리가 뉴비긴에게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가 평생을 에큐메니컬 운동에 몸담았던 복음주의자라는 점에 있다. 그는 진보적 학생운동인 SCM 간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평생을 WCC운동에 깊숙히 관여해 왔다. IMC와 WCC의 통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것도 레슬리 뉴비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생동안 그 누구보다 선명한 복음주의적 신학과 삶을 견지해 왔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수많은 갈등과 상처 속에서도 교회의 연합을 위해 몸바쳐온 한 복음주의자의 헌신과 고뇌가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졌다.

WCC 부산총회로 교회가 많이 시끄럽다.
요즘 에큐메니컬 운동을 사단, 마귀 대하듯 하는 것이 복음주의이며 참된 보수신앙인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듯 하다. 만약 듣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들에게 레슬리 뉴비긴의 인생은 귀기울여 듣고 씨름해야 할 큰 고민거리를 던져줄 것이다.
그래서 레슬리 뉴비긴의 생애가 담겨 있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 더 많이 주목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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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소개서들이 복음의 개인적 의미에 치우쳐 있는 현실 속에서 복음의 총체성을 전달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최근의 몇몇 복음소개서의 계보에 서 있는 책이다. 
저자가 총체적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땅에서 바라본 복음'과 '하늘에서 바라본 복음'이라는 두 가지 컨셉으로 복음이 가지는 개인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각각 다루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분리해서 서술하는 것이 개념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개인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총체적인 복음이 가지는 풍성함을 전달하는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고 느껴졌다. 또한 전반부에서 개인구원과 칭의를 설명할 때는 다소 반문화적인 태도를 드러내다가, 후반부에서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주장할 때는 전반부에서 드러낸 스스로의 관점과 충돌하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완전한 진리"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는 강력한 포스를 뿜는 제목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완전한 진리'가 읽고보니 완전한 진리가 아니었듯이, '완전한 복음'도 결국 완전한 복음이라 하기엔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다. 
원제인 "Explicit Gospel"은 명백한 복음, 또는 분명한 복음 정도에 해당하는 의미인데 차라리 그렇게 직역하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 생각된다.

쓰다보니 박한 평가가 이어졌는데, 기대치에 비해 아쉬움이 많았던 것이지 책 자체는 훌륭하다고 본다. 저자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확신에서 나오는 호소력도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본다.
복음에 대해 정리해주는 책을 읽고자 할 때에 <냅킨 전도>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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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성경읽기에 도움되는 책 한 권 더 소개합니다.
레슬리 뉴비긴의 <성경 한 걸음>입니다. 처음 이 책에 대해 들었을 때,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 정도의 볼륨을 예상했던 저는 책의 두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책은 소책자보다 약간 큰 사이즈의 판형에 여백이 매우 넓은 107쪽 자리 책입니다. 집중해서 읽으면 다 읽는데 두 시간이 채 안 걸립니다. 이것은 이 책을 다른 모든 성경개관서들과 차별화해주는 최고의 장점이 됩니다. 앞서 "더 스토리"의 추천글에서 언급했던 모든 성경개관서들 중 가장 얇은 책도 이 책보다는 최소 두 배 이상의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사역자로서 청년들이 성경과 친해지도록 돕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현실적인 고민은 나름 쉽게 잘 정리된 책들이라도 성경개관서 중에는 얇은 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청년들이 성경통독과 병행해가며 성경개관서를 완독해갈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분량만 적다고 무턱대고 아무 책이나 권할 수는 없으니, 결국 검증된 저자가 쓴 얇은 성경개관서가 꼭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무려 레슬리 뉴비긴이 한두시간 안에 읽히는 성경이야기를 썼다면?
이것이 짧은 분량이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 대가답게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성경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잘 담아내었습니다. 책이 성경의 이야기순서를 따르고 있어서 신학적, 문학적 의도를 가지고 시간순서를 거슬러 성경이야기를 재배열하기도 하는 "더 스토리"보다 성경의 흐름이 훨씬 더 명확히 잡힙니다. 또한 책이 워낙 짧다보니 앞의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책을 완독할 수 있어 성경 전체 내러티브와 신학적 강조점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이처럼 짧은 분량으로 인한 여러 장점들이 있지만, 그로 인한 한계도 분명합니다. 너무 적은 분량으로 인해,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독자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거의 없고 성경을 아예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책이 제시해주는 뼈대가 너무 앙상하여 그 위에 무언가 세워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이 홀로 독자들을 성경의 세계로 인도하는 성경개관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는 다소 어려워보입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가 매우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성경개관강의를 만드는 사역자들이 강의구성을 위해 참고하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개관강의의 수강생들이 그 강의 외에 별도로 두꺼운 성경개관서로 예습, 복습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 예습, 복습 교재로 이 책이 가장 좋을 거 같습니다.

글이 장황해졌습니다. 이 한마디면 될 것을...^^
"레슬리 뉴비긴이 두시간짜리 성경개관강의를 해줍니다. 끝!"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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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나온 성경개관서들을 살펴보면 내용이해와 암기를 돕는데 주안점을 둔 교재 스타일의 책들이 많았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성경 파노라마", "특급 신구약 관통", "어, 성경이 읽어지네" 등등의 책들은, 신학적 관점이 빈약한 시간순 이야기 배열, 암기를 위한 단순 도식화 등이 장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계로도 작용하는 책들입니다.
최근 신학적 동향은 지식 축적을 위한 성경 읽기보다는 "성경의 전체 내러티브에 젖어들기" 위한 성경읽기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형성하고 삶을 방향을 제시해주는 원천으로서의 성경 내러티브의 힘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기존의 성경개관서들과 구별되는 이러한 강조점을 가진 성경개관서들 중 국내에 번역된 가장 대표적인 책은 "성경은 드라마다"(IVP)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책이라 생각하기에 누군가가 성경개관서를 소개해달라 할 때마다 그동안 많이 권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책 딱딱하고 어렵던데"라는 반응들이 많았습니다. 신학생들도 대부분 끝까지 읽지 않고 중간에 접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성경은 드라마다"의 가장 아쉬운 점은 '성경이야기에 젖어들어봐'라고 독자들을 초대한 후 매우 탁월한 관점으로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고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품고 있는 신학과 전달방식 사이의 불일치가 이 훌륭한 책의 가장 큰 아쉬운 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드라마다"가 하고자 했던 일을 해낸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이 책 <더 스토리>입니다. 

1부의 역사적 시점은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중 한 노인을 통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모여앉아 노인을 통해 창세기에서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듣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 이야기 안에서 '그들은 누구이며, 왜 포로가 되었는지, 앞으로 그들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는지'에 대한 대답들을 조금씩 발견해갑니다.
2부의 역사적 시점은 초대교회입니다. 핍박받는 예수공동체의 일원인 한 여인이 그들의 모임에 찾아온 한 상인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결국 예수를 받아들인 상인이 노년이 되어 인생을 회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눈물이 핑돌만큼 감동적입니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성경이야기를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성경이야기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형성해갔는지를 바벨론 포로기와 핍박받는 초대교회라는 치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지요. 품고 있는 신학에 딱 맞는 전달 방식을 채택한 저자의 탁월한 감각에 찬사를 보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교재 스타일의 성경개관서들과 장단점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보면 됩니다.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취하다보니 이야기 배열이 시간순이 아닌 경우가 빈번히 나타납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성경이해가 없는 독자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 방식이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데는 매우 좋지만,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서 이런 방식을 취하다보니 성경 이야기 자체를 들려줄 지면이 많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도 과감하게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성경통독과 병행하지 않고는 이야기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며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단순히 성경지식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매우 심오한 신학적 도전을 던지고 있는 책이라는 점 역시 이 책의 매우 큰 장점이면서도 독자에 따라 난점이 되기도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장단점이 극명한 책이지만 "성경이야기 들려주기"라는 목적을 제대로 완수해낸 훌륭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방학에 성경통독과 병행해가며 <더 스토리>에 한번 빠져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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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포스팅해왔던 독서소감문을 의도하고 쓴 글이 아니라 신대원 과제 제출용으로 쓴 글입니다. 그래서 분량도 좀 길고, 글의 앞부분에서는 과제 분량을 채우고자 문장을 길게 늘린 흔적이 역력하다가 분량을 채우고 나서는 별다른 정리도 없이 갑자기 글이 끝나버리는, 매우 불량한 글이 되었네요.ㅋ
책을 읽은지가 오래되어 기억을 더듬어가며 글을 쓰다보니 책의 세부사항보다는 책 전체의 요지와 그에 대한 저의 개인적 입장을 피력하는 글이 되었습니다. 
글에서 밝히고 있는 저의 개인적 견해는 좀 더 정리가 필요한,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현재까지의 입장일 뿐입니다. 하지만 랍 벨의 책이 일으킨 지옥논쟁이나 이것과 관련된 구원론, 종말론 이슈에 관심 있는 분들이 생각을 더 진전시켜 가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무려 과제물을 이곳에 올립니다.
글이 기니 관심 있는 분만 읽으세요^^ 

『사랑이 이긴다』는 몇 년 전 북미에서 크게 일어난 지옥 논쟁을 촉발시킨 책이다. 나는 『사랑이 이긴다』의 저자 랍 벨을 그가 쓴 다른 저서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는 약자의 고통에 둔감한 교회, 그러면서도 권력과 부에 취해버린 교회는 바벨론 유배상태를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강력한 고발을 하고 있는 책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랍 벨은 일차적으로 미국 교회를 향해 말했지만 나는 그의 메시지가 한국교회에도 너무나 적실하다고 느꼈다. 그 책으로 인해 랍 벨은 짐 월리스와 함께 내가 당시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북미 저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낸 새로운 책이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랍 벨이 지옥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것이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고 보편구원론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출간된 후 이 책은 기독교 보수 진영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존 파이퍼가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잘 가게, 랍 벨(Farewell, Rob Bell)”이라는 짧은 글은 기독교 보수진영이 이 책을 읽고 느꼈던 분노와 당혹스러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같은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유진 피터슨과 리처드 마우 같은 이들은 랍 벨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이 책을 오독하지 말고 랍 벨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도에 귀기울일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 책 
『사랑이 이긴다』
는 복음주의권 내에 지옥과 구원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책이 되었다. 나는 랍 벨이 자신의 미래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그토록 민감한 주제를 하필 목회자나 기독교 저술가로서 한참 주목받고 있던 그 시점에 왜 다루어야만 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품고, 한편으로는 ‘이 책으로 인해 랍 벨 같은 저자가 한국 교회로부터 외면 받아서는 안될텐데’ 하는 걱정과 우려를 품고 이 책을 읽었었다.

이 문제작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이 내 마음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을 경험했다. 내 마음 속의 존 파이퍼가 랍 벨을 기소하자 내 마음 속의 유진 피터슨과 리차드 마우가 랍 벨을 변호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다중인격의 상태로 책을 읽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사리 한 방향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으니, 여러모로 참으로 쉽지 않은 책읽기였다. 
랍 벨이 던지고 있는 문제 제기는 전통적인 보수 기독교의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예리하게 잘 짚고 있다. 기독교 보수진영은 성경이 지옥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상은 그리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보수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에는 대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인간의 운명이 매우 강조된다. 무섭고 고통스럽고 잔인한 지옥이 강조될수록 거기에서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가 더욱 크게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성경은 보수 기독교가 제시하는 복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옥에 대해 적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보수 교회들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호소하는 것이 그토록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연 공포와 두려움이 사람을 참된 믿음으로 이끌 수 있는가? 영원한 형벌을 피하기 위한 보험으로 예수를 믿기로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닫힌 마음, 완고한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던가? 우리는 지옥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기보다는 완악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모든 인간을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지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더욱 강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명하고 단호한 한 뜻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일어났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라운 것이라면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지옥에 대한 공포로 협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강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책이 보수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저자가 던지는 문제의식이 거기에서 멈추었다고 한다면, 이 책은 이처럼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나 역시도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의 내용 전부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이 책은 저자가 보편구원론을 주장한다고 이해될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나는 ‘보편구원론’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낙인효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음을 밝히고 싶다. ‘보편구원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위험성이란, 그 단어가 어떤 견해에 대해서 사용되는 순간 그 견해는 비정통 이단으로 낙인 찍혀버리게 되고 따라서 그 견해가 낳을 수도 있었던 어떠한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신학적 사유도 아예 원천봉쇄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보편구원론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유보하고, 신뢰할 만한 멘토들인 유진 피터슨과 리처드 마우의 조언을 따라 랍 벨이 말하고자 하는 것 자체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끝내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성경이 지옥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옥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 안에서 지옥이 언급될 때 그것은 대부분 비유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비유는 정보전달이나 세부사항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적합한 이야기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성경에 나타나는 지옥에 대한 진술을 통해서 지옥의 모습과 형태 등을 유추해보려는 것은 가망 없는 시도라고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떠한 신학적, 목회적 유익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 채로 놓아둘 수 있는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불가지론은 신학적으로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어떤 것은 알리시고 어떤 것은 알리지 않으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다. 따라서 나는 지옥의 모습과 형태에 대한 그 모든 무성한 추측과 주장들은 겸손히 입을 다물고 불가지론의 영역으로 한 발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지옥에 대해서는 유독 말을 아끼셨다.
하지만 성경은 지옥의 모습과 형태 등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최종 구속의 때까지 끝끝내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되기를 선택하는 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결국 배제되고야 마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성경에서 주로 비유로 표현되어 있는 지옥에 대한 진술들이 던져주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랍 벨보다 더 분명하고 성경적인 답을 던져주는 이는 미로슬라브 볼프다. 볼프는 그의 명저 
『배제와 포용』
에서 지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마지막 장을 통해서 이 문제에 간접적인 통찰을 던져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볼프는 그 책 전체를 통해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대한 포용이 계시된 사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이 배제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진정하고도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폭력과 평화”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은 이러한 볼프의 주장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다루고 있다. 바로 성경에 나타나는 심판 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십자가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포용이 나타났다면,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완성을 그려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에서 백마 탄 자의 폭력으로 표상되고 있는 심판 신학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다. 볼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십자가는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의와 기만의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방법이다. 양극성이 존재하는 까닭은 일부 인간들이 ‘바로잡히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수난(십자가)을 폭력을 눈감아 주는 신적 약함의 표현-죄를 범한 이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들의 폭력을 종식시키시는 하나님의 진노(칼)을 자초할 뿐이다. 나는 백마를 탄 자의 폭력은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 IVP, p474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볼프의 사유가 랍 벨의 그것보다 더 깊으며 더 성경적이고 굳건한 기초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이며 최종적 구속을 상징적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는 요한계시록에서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양극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끝내 거절하고야 만 이들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가 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볼프가 예수를 믿지 않는 한 개인이 사후에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게 되는가 하는 이슈에 대한 답변으로 위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악과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가는 중에 위 글을 썼다는 점은 볼프를 오독하지 않기 위해 재차 강조해야 할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 내용이 지옥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그 엄청난 포용적 사랑에 의해서도 구속되기를 끝내 거부하는 모든 것들-사람이든 영적인 존재이든-은 결국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배제될 것이다. 지옥이라는 단어에 그동안 덧씌워진 온갖 끔찍한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그러한 배제를 ‘지옥’이라 부를 수 있다. 나는 그 ‘지옥’이 어떠한 모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젠 죽을 수조차 없게 된 인간을 하나님이 끓는 가마솥에 영원히 튀기고 어떤 인간에게는 예리한 바늘 위를 영원히 걸어다니도록 하는 곳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것이 지옥에 대한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개념을 다소 희화화한 것임은 인정하지만,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고통이 죽지 않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곳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는 통한다고 본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인간을 벌주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보통 보수주의자들은 죄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어떤 노력도 그러한 지옥을 운영하시는 고문기술자 하나님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 사이의 엄청난 괴리의 틈을 제대로 메우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그러한 지옥의 이미지는 타락 이후에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인간이 그러한 물리적인 고통과 형벌을 가정해야만 지옥을 그려볼 수 있는 가엾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하나님의 최종적 구속의 때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고 행복한 것인지 온전히 알려지게 되면 반대로 그것으로부터의 배제가 얼마나 큰 상실이며 큰 고통인지도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될 그 때에는, 하나님을 굳이 극악한 고문기술자로 만들지 않더라도, 극도의 물리적 고통과 영원한 형벌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의 배제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이며 ‘지옥’임을 비로소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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