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포스팅해왔던 독서소감문을 의도하고 쓴 글이 아니라 신대원 과제 제출용으로 쓴 글입니다. 그래서 분량도 좀 길고, 글의 앞부분에서는 과제 분량을 채우고자 문장을 길게 늘린 흔적이 역력하다가 분량을 채우고 나서는 별다른 정리도 없이 갑자기 글이 끝나버리는, 매우 불량한 글이 되었네요.ㅋ
책을 읽은지가 오래되어 기억을 더듬어가며 글을 쓰다보니 책의 세부사항보다는 책 전체의 요지와 그에 대한 저의 개인적 입장을 피력하는 글이 되었습니다.
글에서 밝히고 있는 저의 개인적 견해는 좀 더 정리가 필요한,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현재까지의 입장일 뿐입니다. 하지만 랍 벨의 책이 일으킨 지옥논쟁이나 이것과 관련된 구원론, 종말론 이슈에 관심 있는 분들이 생각을 더 진전시켜 가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무려 과제물을 이곳에 올립니다.
글이 기니 관심 있는 분만 읽으세요^^
『사랑이 이긴다』는 몇 년 전 북미에서 크게 일어난 지옥 논쟁을 촉발시킨 책이다. 나는 『사랑이 이긴다』의 저자 랍 벨을 그가 쓴 다른 저서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는 약자의 고통에 둔감한 교회, 그러면서도 권력과 부에 취해버린 교회는 바벨론 유배상태를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강력한 고발을 하고 있는 책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랍 벨은 일차적으로 미국 교회를 향해 말했지만 나는 그의 메시지가 한국교회에도 너무나 적실하다고 느꼈다. 그 책으로 인해 랍 벨은 짐 월리스와 함께 내가 당시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북미 저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낸 새로운 책이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랍 벨이 지옥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것이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고 보편구원론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출간된 후 이 책은 기독교 보수 진영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존 파이퍼가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잘 가게, 랍 벨(Farewell, Rob Bell)”이라는 짧은 글은 기독교 보수진영이 이 책을 읽고 느꼈던 분노와 당혹스러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같은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유진 피터슨과 리처드 마우 같은 이들은 랍 벨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이 책을 오독하지 말고 랍 벨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도에 귀기울일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 책
『사랑이 이긴다』는 복음주의권 내에 지옥과 구원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책이 되었다. 나는 랍 벨이 자신의 미래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그토록 민감한 주제를 하필 목회자나 기독교 저술가로서 한참 주목받고 있던 그 시점에 왜 다루어야만 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품고, 한편으로는 ‘이 책으로 인해 랍 벨 같은 저자가 한국 교회로부터 외면 받아서는 안될텐데’ 하는 걱정과 우려를 품고 이 책을 읽었었다.
이 문제작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이 내 마음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을 경험했다. 내 마음 속의 존 파이퍼가 랍 벨을 기소하자 내 마음 속의 유진 피터슨과 리차드 마우가 랍 벨을 변호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다중인격의 상태로 책을 읽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사리 한 방향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으니, 여러모로 참으로 쉽지 않은 책읽기였다.
랍 벨이 던지고 있는 문제 제기는 전통적인 보수 기독교의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예리하게 잘 짚고 있다. 기독교 보수진영은 성경이 지옥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상은 그리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보수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에는 대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인간의 운명이 매우 강조된다. 무섭고 고통스럽고 잔인한 지옥이 강조될수록 거기에서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가 더욱 크게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성경은 보수 기독교가 제시하는 복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옥에 대해 적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보수 교회들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호소하는 것이 그토록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연 공포와 두려움이 사람을 참된 믿음으로 이끌 수 있는가? 영원한 형벌을 피하기 위한 보험으로 예수를 믿기로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닫힌 마음, 완고한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던가? 우리는 지옥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기보다는 완악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모든 인간을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지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더욱 강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명하고 단호한 한 뜻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일어났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라운 것이라면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지옥에 대한 공포로 협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강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책이 보수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저자가 던지는 문제의식이 거기에서 멈추었다고 한다면, 이 책은 이처럼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나 역시도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의 내용 전부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이 책은 저자가 보편구원론을 주장한다고 이해될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나는 ‘보편구원론’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낙인효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음을 밝히고 싶다. ‘보편구원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위험성이란, 그 단어가 어떤 견해에 대해서 사용되는 순간 그 견해는 비정통 이단으로 낙인 찍혀버리게 되고 따라서 그 견해가 낳을 수도 있었던 어떠한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신학적 사유도 아예 원천봉쇄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보편구원론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유보하고, 신뢰할 만한 멘토들인 유진 피터슨과 리처드 마우의 조언을 따라 랍 벨이 말하고자 하는 것 자체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끝내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성경이 지옥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옥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 안에서 지옥이 언급될 때 그것은 대부분 비유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비유는 정보전달이나 세부사항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적합한 이야기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성경에 나타나는 지옥에 대한 진술을 통해서 지옥의 모습과 형태 등을 유추해보려는 것은 가망 없는 시도라고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떠한 신학적, 목회적 유익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 채로 놓아둘 수 있는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불가지론은 신학적으로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어떤 것은 알리시고 어떤 것은 알리지 않으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다. 따라서 나는 지옥의 모습과 형태에 대한 그 모든 무성한 추측과 주장들은 겸손히 입을 다물고 불가지론의 영역으로 한 발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지옥에 대해서는 유독 말을 아끼셨다.
하지만 성경은 지옥의 모습과 형태 등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최종 구속의 때까지 끝끝내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되기를 선택하는 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결국 배제되고야 마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성경에서 주로 비유로 표현되어 있는 지옥에 대한 진술들이 던져주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랍 벨보다 더 분명하고 성경적인 답을 던져주는 이는 미로슬라브 볼프다. 볼프는 그의 명저
『배제와 포용』에서 지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마지막 장을 통해서 이 문제에 간접적인 통찰을 던져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볼프는 그 책 전체를 통해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대한 포용이 계시된 사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이 배제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진정하고도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폭력과 평화”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은 이러한 볼프의 주장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다루고 있다. 바로 성경에 나타나는 심판 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십자가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포용이 나타났다면,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완성을 그려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에서 백마 탄 자의 폭력으로 표상되고 있는 심판 신학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다. 볼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십자가는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의와 기만의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방법이다. 양극성이 존재하는 까닭은 일부 인간들이 ‘바로잡히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수난(십자가)을 폭력을 눈감아 주는 신적 약함의 표현-죄를 범한 이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들의 폭력을 종식시키시는 하나님의 진노(칼)을 자초할 뿐이다. 나는 백마를 탄 자의 폭력은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IVP, p474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볼프의 사유가 랍 벨의 그것보다 더 깊으며 더 성경적이고 굳건한 기초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이며 최종적 구속을 상징적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는 요한계시록에서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양극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끝내 거절하고야 만 이들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가 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볼프가 예수를 믿지 않는 한 개인이 사후에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게 되는가 하는 이슈에 대한 답변으로 위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악과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가는 중에 위 글을 썼다는 점은 볼프를 오독하지 않기 위해 재차 강조해야 할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 내용이 지옥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그 엄청난 포용적 사랑에 의해서도 구속되기를 끝내 거부하는 모든 것들-사람이든 영적인 존재이든-은 결국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배제될 것이다. 지옥이라는 단어에 그동안 덧씌워진 온갖 끔찍한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그러한 배제를 ‘지옥’이라 부를 수 있다. 나는 그 ‘지옥’이 어떠한 모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젠 죽을 수조차 없게 된 인간을 하나님이 끓는 가마솥에 영원히 튀기고 어떤 인간에게는 예리한 바늘 위를 영원히 걸어다니도록 하는 곳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것이 지옥에 대한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개념을 다소 희화화한 것임은 인정하지만,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고통이 죽지 않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곳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는 통한다고 본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인간을 벌주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보통 보수주의자들은 죄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어떤 노력도 그러한 지옥을 운영하시는 고문기술자 하나님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 사이의 엄청난 괴리의 틈을 제대로 메우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그러한 지옥의 이미지는 타락 이후에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인간이 그러한 물리적인 고통과 형벌을 가정해야만 지옥을 그려볼 수 있는 가엾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하나님의 최종적 구속의 때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고 행복한 것인지 온전히 알려지게 되면 반대로 그것으로부터의 배제가 얼마나 큰 상실이며 큰 고통인지도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될 그 때에는, 하나님을 굳이 극악한 고문기술자로 만들지 않더라도, 극도의 물리적 고통과 영원한 형벌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의 배제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이며 ‘지옥’임을 비로소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