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박영돈, IVP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름 ‘톰라이트빠’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국내에 출간된 톰 라이트 책을 대부분 읽었고, 그를 비판하는 책이나 글도 꽤 읽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박영돈 교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의 출간은 저를 매우 설레게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짧은 소감은, 제가 지금까지 접해본 톰 라이트 비평글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반부에서 톰 라이트의 바울 신학을 ‘E. P. 샌더스에게서 받은 영향’, ‘제임스 던에게서 받은 영향’, ‘톰 라이트의 고유한 주장’으로 나누어 분석/정리한 부분은, 톰 라이트 본인보다 톰 라이트의 바울신학을 더 명료하게 정리했다고 느껴질만큼 탁월합니다.
에피타이저인 톰 라이트의 바울신학에 대한 요약 부분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게다가 메인디시인 톰 라이트 비평 파트 역시 매우 훌륭합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가 조직신학자인지라 성서주해보다는 교리논쟁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그런 방식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신약성서학자를 상대할 수 없음을 존 파이퍼가 이미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해당 본문에 대한 주해를 통해 톰 라이트의 칭의론을 요목조목 비판하는 저자의 논리는 매우 예리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톰 라이트의 기획은 ‘역사적예수’와 ‘바울신학’으로 구분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역사적예수 분과에 있어서는 그의 주장에 거의 전부 동의합니다. 하지만 바울신학에 있어서는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에 입각한 자신의 신학적 전제들과 일관성 있게 짜맞추려다보니 그가 일부 본문에서 다소 억지스런 주해를 하고 있다고 느껴왔습니다.
몇몇 본문의 주해에서 느껴지는 뭐랄까 좀 과하다는 느낌, 저자는 그런 부분들을 매우 정확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박영돈 교수의 주장대로, 바울의 글 중에는 새관점으로는 제대로 읽어낼 수 없고 옛관점으로 읽을 때에만 더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는 본문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 텍스트에 대한 옛관점과 새관점 사이의 양자택일식 논쟁은 이제는 다소 소모적으로 느껴지는게 사실입니다.
최근 많은 신약학자들이 인정하듯이, 1세기 유대교에는 언약적 신율주의와 율법주의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위선과 공로사상,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 둘 다에 대항해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텍스트는 옛관점과 새관점을 함께 가지고 읽을 때에 가장 잘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김세윤 박사도 그의 책 <칭의와 성화>에서 힘있게 주장한 바 있고, 근래엔 톰 라이트 역시 옛관점과 새관점의 통합의 필요성을 깊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느 것이 주가 되어야 하는가에 있어서 김세윤 박사는 옛관점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톰 라이트는 새관점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톰 라이트의 바울 해석에서 나타나는 몇몇 억지스러움은 그가 대부분의 텍스트를 새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박영돈 교수도 이 책에서 바울해석에 있어서 주된 것은 옛관점이라는 전제 하에 새관점의 필요성도 부차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톰 라이트가 옛관점과 새관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저자는 톰 라이트가 옛관점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이면서 왜 몇몇 주해에서는 옛관점을 들여오는지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옛관점‘만으로’ 바울 텍스트를 읽어서 개인구원에만 매몰되어버리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지, 옛관점 자체에 대해서는 저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톰 라이트가 옛관점과 새관점을 아우르며 바울을 해석하는 것을, 필요할 때만 옛관점을 슬그머니 들여오는 비겁한 행동인 듯 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비난입니다.
톰 라이트는 최근 저작으로 올수록 더욱 옛관점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여줍니다.
(최근에 그가 자신의 바울신학 안에 옛관점을 얼마나 많이 수용해냈는지는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철지난 떡밥 같은 이 옛관점/새관점 논쟁보다, 톰 라이트의 바울신학에서 가장 논란이 될만한 지점은 ‘미래의 칭의’에 관한 부분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신자가 의롭다는 판결이 예수의 의를 힘입어 내려질 것인가, 성령과 동행하여 실제로 의로워진 그의 생애를 통해서 내려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안 그래도 톰 라이트를 달가워하지 않는 보수교회들이 그를 철저히 외면하게 할만큼 매우 민감하고 폭발력 있는 이슈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미래의 칭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 역시 쉽게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울만치 설득력 있습니다.
본론인 비평 파트를 읽으면서, 당대 최고의 신약학자의 주장을 이렇게 얇은 책으로 효과적으로 반박해낸 저자의 내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바울신학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가 마구 쏟아져나옵니다.
개혁주의 공동체에게 이 부분은 교리공부하는 텍스트로도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반부는 톰 라이트의 바울신학 요약, 중반부는 톰 라이트의 바울신학 비평, 후반부는 개혁신학 교리정리...
얇은 책이 이처럼 다양한 면모와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몇 가지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톰 라이트가 1세기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전제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하면서, 전문학자들이나 알만한 배경지식이 성서해석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성서는 학자나 무학자나 모두 올바르게 해석해낼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자 해석학적 유산이라는 것이지요.
주장의 취지는 일부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찌되었든 신약성서는 1세기의 문서입니다. 1세기의 저자와 독자에게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현대 독자에게는 가려진 지식, 가치관, 사고방식, 전제, 문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 부분이 드러나 성서해석에 반영될 때 우리의 해석은 변화되고 수정되면서 성서에 대한 더 바른 이해로 나아갑니다.
성서신학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배경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알려서 우리가 성경을 더욱 올바르게 읽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의 배경연구를 통해 우리가 당시의 시대상을 완벽히 복원할 수 없고, 잘못된 배경지식이 해석의 오류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배경연구를 너무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문신학자만이 제시할 수 있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주장은 성서연구분과에 있어서 자칫 신학 무용론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톰 라이트가 하나님나라의 큰 그림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개인구원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는 위대한 구원 계획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는 일관된 관점으로 바울의 복음을 해석하려는 라이트의 야심찬 기획에서, 하나님은 한 죄인을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시는 개인의 구원자라는 측면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p171
저는 이런 비판을 톰 라이트가 듣는다면 많이 억울해하리라고 봅니다. 톰 라이트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그의 바울신학만이 아니라 역사적예수 연구를 포함한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바울 텍스트에 대한 몇몇 주해만을 바탕으로 그가 개인구원의 중요성에 대해 평가절하한다고 평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방대한 저작들을 힘에 부치게 따라갔던 그 여정에서, 하나님나라의 큰 그림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로 사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자유와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에 대해 깊이 깨닫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톰 라이트가 개인 구원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몇가지 아쉬움을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정말 뛰어난 톰 라이트 비판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저자가 후기에서 보여준 겸손하고 개방적인 태도 역시 인상깊었습니다.
“이러이러해서 톰 라이트 위험해. 그러니 읽지마. 끝.” 이 아니라, 이러한 비평과 상호대화를 통해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잘 알게 되고 하나님나라가 진보해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저자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 책이 그렇게 쓰이면 좋겠습니다.
신학했다는 이들 중에도 학자의 원전과 씨름해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소위 ‘안전한 학자들과 위험한 학자들의 목록’만 잔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이 ‘역시 톰 라이트는 위험해’ 라는 선입견을 확증하는 근거로 손쉽게 쓰이지 않길 바랍니다.
톰 라이트의 칭의론 일부분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보여준 바울신학의 전체 그림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예수 연구의 영역에서 역사비평이 해체해버린 복음서의 역사성을 수호해낸 톰 라이트의 위대한 업적은 지금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톰 라이트에게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서 한두권 읽고 쉽게 제껴버리는 건 참으로 아쉬운 선택입니다. 그는 아직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