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종말>, 미로슬라브 볼프, IVP


<기억의 종말>은 평화와 화해의 신학자 볼프가 '기억'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쓴 책입니다.
볼프는 이 책에서 기억이라는 주제 전반에 대해 이러저러한 추상적 논의를 전개해 가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당한 피해자의 기억'으로 초점을 좁혀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유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 사유는 볼프가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군복무할 때에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로 의심받아 G대위에게 비인도적인 함정수사 및 심문을 당했던 고통스런 기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볼프는 그 기억과 씨름하는 가운데, '가해자의 악행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에게 진실하게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러한 피해의 기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피해의 기억은 마지막 때에 어떻게 되는가' 등의 묵직한 질문들을 던지고 차근차근 답해 나갑니다.


이 책은 출간시점이 세월호2주기와 가까웠기 때문에 기억과 관련한 사회적 쟁점(세월호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일본군 위안부 등)과 관련하여 많이 회자되고 있는 듯 합니다. 
출간좌담회에서도 '세월호 이후 우리에게 기억은 무엇인가?'라는 논의가 포함되어 있던 걸 보면 출판사의 홍보방향도 그러했던 듯 합니다.
그런 거시적 안목으로 읽는 것이 유익하다는데 조금의 이의도 없지만, 저는 그보다 '나의 개인적인 상처의 기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랜 과거로부터 이어져 지금도 여전히 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때 내적치유를 주제로 한 책들을 탐독했었고, 일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요즘은 확실히 검증된 책이 아니면 잘 읽지 않습니다. 
치유의 소망을 불어넣고서 믿음을 격려하며 마무리하는 천편일률적 패턴이 내용없는 말잔치처럼 느껴지기 시작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치유하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피상성이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그 어떤 내적치유서적보다도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실하게 기억할 의무'에 대해 읽으며 나의 상처의 기억은 가해자에게 공정한가 돌아보기도 했고, 기억하기의 궁극적 목적인 용서와 화해를 위해 이 시점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다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이 책 한 권과 진득하게 씨름하는 것은 좋은 내적치유수양회를 다녀온 것에 비견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가 이 책의 홍보컨셉을 '치유'로 잡아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의 미래'를 다루는 3부에서는 소망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될만한 부분은 3부입니다.
저자는 이 땅에서 있었던 악행의 기억이 천국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신학적 가설을 제안합니다. 
그는 성경적 신학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예상되는 반론을 차분히 반박해갑니다. 
볼프의 가설이 옳음을 입증할 만한 성경적 근거가 충분히 명시적이지 않으므로 다르게 볼 여지도 있지만, 저는 잠정적으로 현재는 볼프의 가설에 동의합니다.
이 책을 읽고 얻은 가장 큰 유익은 천국을 더욱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훗날 그 나라에서 나에게 해를 입힌 이들, 그리고 내가 해를 입힌 이들이 그 모든 아픔을 잊고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고 서로를 기뻐하는 비전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객관적으로 굉장한 책이며, 개인적으로는 다 읽고 눈물이 핑 돌만치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기억의 종말> 강추합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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