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노먼 메일러, 뿔
관심사를 책으로 배우는 고약한 습관(?) 탓에 읽게 된 복싱의 고전입니다.
이 책은 "킨샤샤의 기적"으로 불리는 1974년,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와 챔피언 조지 포먼 간의 헤비급 타이틀매치 "럼블 인 더 정글"에 대한 르포르타주입니다.
복싱사에 길이 남은 명경기라고 하는데,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경기인데다 인생의 대부분을 복알못으로 지낸터라 저는 이 책을 통해 이 경기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25세의 챔피언 조지 포먼은 40전 전승(37KO) 무패에 92.5%의 가공할 KO율을 기록하며, 복싱 역사상 가장 강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당시 32세의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챔피언벨트를 박탈당한 후 몇 년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타이틀 획득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전성기가 한참 지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문가 중에 알리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 경기에서 알리는 후에 '로프 어 도프'라고 이름 붙여진 전략을 사용합니다.
로프에 누울 듯 기대어 포먼의 펀치를 피하거나 약화시키다가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간헐적으로 반격하며 지구전을 펴는 전략이었습니다.
알리는 이 방법으로 무려 8라운드까지 조금씩 포먼의 체력을 빼놓으며 기회를 노리다가 한 번의 강한 역습을 통해 KO승리를 이끌어냅니다.
당시 해설자들조차 알리가 경기 내내 로프에 몰려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7라운드가 끝날 때에야 비로소 알리의 전략을 눈치챘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 경기를 알리가 내내 고전하다가 행운의 역전승을 거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리의 훈련을 내내 참관해온 저자에 의하면, 알리는 시합 전 스파링에서 로프를 이용해 상대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을 끊임없이 연습했습니다(그것이 저자의 눈에 알리가 스파링을 귀찮아하는 모습으로 비춰진 대목도 흥미로웠습니다).
알리(또는 알리의 코치)는 쉼없이 때리고 박살내는 포먼의 복싱스타일에 맞춘 영리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좋은 전략도 그것을 두려움없이 수행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소용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리는 매라운드 포먼이 쏟아내는 가공할 핵펀치를 용감히 받아내며 그 전략을 완벽히 수행해내었습니다.
결국 '킨샤샤의 기적'은 포먼의 승리를 예상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일지 몰라도 알리에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에도 비슷한 관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009년 미국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엔진 고장을 일으킨 비행기를 체슬리 설리 설렌버거 기장이 무사히 착륙시켜 155명의 승객을 구했던 사건입니다.
라이트는 그 사건 역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겠지만, 비상상황을 수없이 상상하고 대응을 연습했던 훈련된 기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로 봅니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럼블 인 더 정글' 경기영상을 찾아서 직접 보니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당대 가장 강력했던 챔피언에 맞서 기적을 만들어내었던 알리의 지혜와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복싱을 배운지 8개월 정도 되어갑니다.
'내년이면 사십줄에 들어서는 나이에 굳이 나는 왜 때리고 맞고 피하는 이 운동을 시작한 걸까?' 자문해봅니다.
주먹 좀 쓴다고 어디가서 거드름 피울 나이도 한참 지났고, 복싱을 배워서 패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프로테스트라던지 생활체육대회 우승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이도 많고 운동신경이 좋은 편도 아니라 배움의 속도도 더딥니다.
스파링할 때면 긴장감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마구 뛰기 시작합니다.
맞으면 아프고 때렸다고 해서 신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굳이 왜?...'
제가 찾은 한 가지 대답은 인생의 고난과 역경에 두려움없이 맞설 용기를 얻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용기라는 것이 굳이 맞고 때리는 운동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닐겁니다.
하지만 터질듯한 긴장감을 이기고 링에 오르면서,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고 맞고 때리며 몇 라운드를 버텨내면서, 내 몫의 용기를 조금씩 형성해갑니다.
그렇게 빚어낸 용기를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인생이 내 맘 같지 않은, 어느 혹독한 시절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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