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휩쓴 화제의 베스트셀러 <화폐전쟁>을 읽었습니다.
책은 세계경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거대금융재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들은 19세기 초반 유럽에서 은행업을 통해 성장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한 그 연관세력인데, 세간의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실질적인 의미의 세계 최대 부자라고 합니다. 역시 저자에 의하면, 이들은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배후세력이며, 암살되거나 의문사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죽음에도 관여했습니다. 이 미국대통령들의 암살은 화폐발행권을 둘러싼 국제금융재벌과 미국대통령들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또한 이 금융재벌들은 세계 1,2차 세계대전을 부추겨 전쟁을 통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했으며, 1990년 도쿄증시폭락과 90년대 중후반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주범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97년 한국의 외환위기 사태도 잠깐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책 전체를 이끌어가는 논리는 일종의 음모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음모론은 이 책의 흥행에 기여한 결정적 요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 책의 문제점이기도 한 양날의 검입니다.
음모론 책이 가지는 강점을 들자면, 흥미 유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거를 성실히 갖춘 이야기들로만 구성된 역사서술은 역사관심자가 아닌 일반독자들에게는 자칫 딱딱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세계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거대세력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합니다(저 역시 이 책이 어찌나 재밌던지 얇지 않은 책인데도 딱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어찌되었든간에 책을 붙들고 읽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으며, 읽고 난 후 화폐와 금융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대략이나마 알게 된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를 두자면 둘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실제 역사적 사건과 그에 대한 저자의 음모론적 해석을 솜씨좋게 조합한 일종의 팩션(faction)입니다. 음모론 책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책도 저자의 음모론 시나리오를 검증된 역사자료들을 통해서 뒷받침하기보다는 다른 음모론 책에서 끌어오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러한 팩션에서 팩트를 구분해낼 만한 충분한 분별력과 배경지식이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가령, 세계통화제도의 역사가 금본위제에서 브레튼우즈체제, 그리고 변동환율제도로 변천해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진단함에 있어서, 화폐를 금이라는 한정된 자원과의 교환가치에 묶어두는 방식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커져가는 실물경제 규모를 통화량이 더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일어난 결과로 보느냐, 아니면 이 책이 말하듯 세계금융재벌들이 화폐를 금에서 떼어놓아 금융착취를 더욱 원활히 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해온 음모로 보느냐는 '역사에 대한 해석'에 해당합니다. 저의 개인적 의견으로는 이 책이 제시하는 '역사에 대한 해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음모론만 잘 걸러내어 읽는다면, 군데군데 좋은 통찰을 주는 부분이 꽤 있는 책입니다. 
가령, 화폐의 존재 의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화폐가 가진 본래적 기능은 거래의 매개이며 가치의 저장입니다. 그러나 이윤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화폐를 그 고유의 기능에서 벗어나 화폐 자체를 투기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로인해 거대금융자본가들이 개인들이 성실히 일하여 모은 재산을 투기적 공격을 통해 강탈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채권과 채무관계를 여러 번 꼬고 비틀어 이윤을 뽑아내는 복잡한 파생금융상품들은 시세차익으로 땀흘리지 않고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인간의 투기적 욕망에 의해 고안된 발명품입니다. 그렇게 부채 위에 부채를 쌓고 부채를 얼키설키 엮어 지은 사상누각이 결국 무너져 내린 것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였습니다.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생겨난 약속인 금융경제가 정작 실물경제를 파괴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돈으로 돈을 먹으려는 극단적 돈놀음, 그 안에 있는 탐욕이 이 세계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음모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책이 투기적 금융자본가들의 탐욕과 비윤리성, 그것을 합법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금융시스템의 모순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그것을 고발하기 위한 예언자적 의분을 가지고 쓴 책은 아님을 반드시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이 책이 음모론의 관점으로 경제사를 흥미롭게 개관하고 오늘날의 세계금융시스템을 맹렬히 비판하고 난 뒤 끝부분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중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이 되는 길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 저자는 중국은 달러 대신 금을 열심히 사모으고 위안화를 금과 연동시켜 달러 이후 시대의 기축통화가 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글로벌금융자본의 중국을 향한 투기적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저자의 중국 패권주의에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음모론으로 보나 담고 있는 태도로 보나 여러모로 그리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

이 책이 아니어도 비슷한 주제에 대해 훨씬 더 큰 통찰과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쓰여진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딱 세 권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세계화 국제포럼이 엮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세계화의 허상을 예리하게 고발한 책입니다. 두 책 모두 금융투기자본의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의 경우, 세계화 문제에 대한 포괄적 비판과 대안 제시를 하고 있는데 제 짧은 독서경험 안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 이보다 뛰어난 책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은 시장의 논리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든 극단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돈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들이 어떻게 훼손되고 파괴되어 가는가를 풍부한 실례를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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