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 물든 세상을 향해 장하준이 던진 회심의 빨간 알약과 같은 책이다.

장하준의 장점은 풍부한 사례와 정확한 수치에 입각하여 빈틈없는 논리를 구사하는 학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매우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색깔이 강하지 않아서 덜 공격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글은 우파에게도 충분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중앙일보는 그런 점 때문에 그를 일컬어 "좌파와 우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이러한 장점을 잘 활용하여 많은 신자유주의 추종자들을 설득해내주길 희망한다.

장하준의 전작들도 매우 훌륭했지만, 그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를 학문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반박해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더이상 논리는 없이 '복지포퓰리즘, 세금폭탄' 등의 선정적 언어로 사람들을 호도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장하준의 23가지 논지를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그런데 내 생각엔 심히 어려울 것 같다).

사실 난 정말로 궁금하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나라야 어찌되든 자기 지갑만 불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뢰배가 아닌 이상 이 책을 읽고나서도 기존의 생각을 고수할 수 있을지 말이다.

 

미국의 사례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의 제목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MB정부가 나라를 말아먹는 23가지 방법"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 책의 문제제기를 심사숙고하여서 신자유주의라는 폭주기관차에는 브레이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길 소망해 본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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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지에 글을 쓴 후에 간간히 보드게임 추천 문의가 들어옵니다.
꽤 많은 게임들을 접해본 편이지만, 사람마다 취향 차이가 크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할만한 게임이 있을 수 없기에 추천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드게임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분들에게 좋은 게임은, 룰이 쉽고, 적은 인원부터 많은 인원까지 커버 가능하고,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그 기준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고의 입문자용 게임은 '사보타지'입니다.

사보타지는 뱅, 마피아 등과 비슷한 블러핑 요소가 들어 있는 팀플 게임입니다. 시작지점에서 출발하여 골인지점이라 할 수 있는 금 카드까지 굴 카드를 놓아서 연결하면 되는 간단한 카드게임입니다. 플레이어 중에는 금을 캐는 것이 목표인 '광부'도 있지만, 금을 캐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꾼(사보티어)'도 있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정체를 모른 체 게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처음엔 모두가 자신이 광부라고 주장하지만, 결정적 순간이 되면 '방해꾼'들이 금 캐기를 마구 방해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재밌는 상황들이 많이 연출되는 유쾌한 게임입니다.
'정체 숨기기'가 게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서 블러핑게임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재밌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장르 중 가장 유명한 게임인 '뱅'과 비교해 볼 때, 뱅은 먼저 제거되어 게임에서 완전히 빠지는 플레이어가 있지만, 사보타지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탈락하는 플레이어가 없다는 점이 좋습니다.
게다가 2~12명 사이의 인원을 다 커버한다는 것은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가족끼리, 친척이 모일 때, 엠티에서 등등 여러모로 즐겁게 갖고 놀 수 있는 카드게임, "사보타지"를 추천합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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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속해있는 단체의 한 잡지의 이번 호 주제가 '놀이'인데, 거기에 보드게임에 대해 쓴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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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보드게이머다!

취미가 뭐에요?” 라는 질문에 보드게임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삼십대 중반의 남자를 만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마도 마음속으로 푸훗. 다 큰 어른이 아직도 부루마블 따위를 하면서 논단 말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누군가 나에게 취미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 취미는 보드게임입니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보드게임이 내 취미 1호로 부상한 것은 최근 일 년 이내의 일이다. 물론 이전부터 간간히 보드게임을 접하고 즐길 기회는 있었다. 교회와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엠티를 가면 국민게임 마피아를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캠퍼스에서 간사로 사역하던 시절에도, (Bang)과 우노(UNO) 등 몇몇 게임을 가지고 학생들과 막차시간도 잊고 열심히 놀았던 추억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보드게임은 기회가 되면 가끔 하지만, 안 한다고 아쉽거나 특별히 생각날 것도 없는 수많은 놀이들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보드게임이 충분히 훌륭한 취미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정릉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학생 시절 참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배와 한 동네에서 살게 된 것이다. 통일운동가이자 공정여행 가이드로 정말 멋지게 살고 있는 선배인데, 알고 보니 이 형의 취미가 보드게임이었다. 이 형이 한 동네로 불러 모은 몇몇 다른 가정들까지 보드게임이라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어서, 이 동네는 가히 보드게이머 집성촌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동네에 살면서 한동안 밤마다 형의 집에 불려가 온갖 신기하고 다양한 보드게임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때도 보드게임에 그다지 큰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떠들썩하고 흥겨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옆방에 아기가 자고 있어 조용히 숨죽여 게임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이 흥미를 갖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전까지 보드게임이라곤 부루마블과 간단한 카드게임 몇 개 정도 해 본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 게임 규칙을 설명하는데만 삼십분 이상이 소요되는 복잡한 게임들이 재미를 붙이기엔 너무 어렵고 낯설었나보다. 하지만 그 때의 경험으로 나는 보드게임이란게 흔히 생각하듯이 주사위나 한두 개 던지면서 노는 어린이 놀이 정도가 아니며, 이 세계도 정말 넓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보드게임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지만, 밤마다 보드판 앞에 오순도순 모여앉아 함께 했던 시간의 그 훈훈하고 따뜻했던 분위기는 내 기억에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보드게임이 공동체 안에서 함께 놀기에 꽤 훌륭한 컨텐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던 그 때가 바로 내 안에 보드게임 유전자가 자리 잡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 후 몇 년 동안의 휴지기를 보내다가, 작년 초에 교회 청년들과 친해지기 위해 보드게임을 하면서 나의 보드게임 라이프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일 년이 지난 지금 보드게임은 어느새 내 인생에 부동의 취미 1호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본격적으로 보드게임 예찬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놀이에 대해 잠시 논해 보려고 한다. 놀이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놀이가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다. 가령, 놀이가 주는 기분전환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놀이는 거기에 몰입해 있는 순간만큼은 눈앞의 문제와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준다. 즐겁게 놀고 나면 정서적인 재충전이 일어나, 다시 일상의 과업을 수행해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놀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남들 눈에는 거의 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사실은 자신만의 놀이를 갖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책장에 꽂힌 책의 배열을 바꾸어가면서 시간을 보낸다. 다른 사람에게는 놀이처럼 보이지 않는 그 활동이 그에게는 훌륭한 놀이일 수 있는 것이다.

놀이에 단순한 기분전환의 효과 이상의 심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있다. 네덜란드 사회학자 요한 하이징거는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인류 문명은 인간의 놀이 본능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 의례, 예술, 발명품 등 인류 문화의 각 영역을 두루 살펴보면 그 최초 발생 과정과 현재의 모습 모두에서 놀이의 흔적과 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놀이 본능을 문명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보고 있으며, 놀이는 문화에 선행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놀이예찬론이 일면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문화, 예술 등이 모두 놀이와 결합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넓은 맥락에서 볼 때 인류 문명은 놀이의 산물이다라는 주장에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의미와 가능성, 잠재력을 가진 것이 바로 놀이이다.

하지만 하이징거의 말대로 놀이가 인류 문화발전의 원동력이라 할지라도, 놀이를 과도하게 즐길 때에 그것이 해로울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망가뜨리기까지 한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른바 중독의 문제다.

나는 에니어그램 7번이다. 성숙하지 못한 7번은 쾌락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다. 절제할 줄 모르는 7번은 쉽게 음식, 알코올 등에 중독된다. 역시 7번이 빠지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놀이 중독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PC게임에 빠져서 컴퓨터 앞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폐인처럼 지내기도 했다. 당시 화목하지 않았던 가정에서 겪은 내면의 고통과 한두 해 앞으로 다가온 대입 입시가 주는 중압감 속에서 PC게임이 제공해주는 가상의 세계는 나에게 현실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시작된 놀이로의 도피가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결국 놀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에니어그램 7번만의 문제겠는가?

오늘날 놀이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중독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PC게임에 중독되어 사회성을 기르지 못해 부모와 함께 치료센터를 찾는 수많은 아이들, 게임비용을 대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폭행한 청소년, 게임에 빠져서 갓난아기가 영양실조에 걸릴 때까지 방치해 버린 부모 등 놀이로 인해 망가져버린 비극적인 인생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처럼 놀이는 고된 일상을 사는 이들의 청량제가 될 수도 있고, 인생을 망치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놀이의 가능성과 위험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 지어진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건강한 놀이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이 땅에 심는 이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놀이가 많은 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기도 하는 이 세상 속에서 놀이문화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변혁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선교지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현대 놀이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고립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사람들이 함께 있어도 서로를 서로에게서 고립시키는 놀이 컨텐츠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TV 앞에 앉아보라. 채널을 돌려가며 그 끝없는 이야기에 빠져 있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당신 옆에서 함께 TV를 보는 이가 누구든 큰 차이가 없으며, 아무도 없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 오직 TV만 있다면 당신은 혼자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게임이든 엔터테인먼트든 컴퓨터가 웹을 통해 가져다주는 무한대에 가까운 컨텐츠 속에서 우리는 혼자서도 너무나 잘 놀 수 있다. 한때는 그나마 TV와 컴퓨터를 집에서만 쓸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태블릿PC와 스마트폰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혼자서 놀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앉아 아무런 대화 없이 각자의 태블릿PC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광경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보드게임은 어떠한가? TV와 컴퓨터 앞에서 혼자 놀기를 즐기라고 유혹하는 이 디지털 과잉의 시대에, 보드게임은 오직 사람과 만나야만 즐길 수 있는 순도 백퍼센트의 아날로그 놀이문화이다. 당신이 혼자 있다면 보드게임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가와 함께라면 보드게임은 당신과 그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매개체가 된다. 종이판과 카드 몇 장, 주사위 몇 개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TV나 컴퓨터가 하듯이 우리를 수동적인 수용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보드게임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며, 그것을 통해 함께 노는 이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보드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함께 TV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을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단어가 써 있는 카드 몇 장씩을 받아서 그것을 본인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대로 배열하고 다른 이들이 그 순서를 맞추도록 하는 게임이 있다(왓츠잇투야http://warinlife79.tistory.com/269). 그 라운드가 끝나면 출제자는 카드 배열의 이유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설명한다. 이것은 서로의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를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는 게임이다. 참여자 전원이 한 편의 동화를 함께 완성해가는 게임도 있다(옛날옛적에, 파불라). 누구와 언제 하는가에 따라 매번 새롭고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제시어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 그림을 보고 다시 제시어를 추측해 써 넣고, 그 단어를 다시 그림으로 표현하는 식으로 진행하여 마지막 사람이 최초의 제시어를 맞추는 게임도 있다(텔레스트레이션). 가족오락관의 몸으로 말해요를 그림그리기 버전으로 만든 게임인 셈이다. 팀 안에 있는 스파이를 몇 번의 토론을 통해 가려내는 토론게임도 있다(마피아, 레지스탕스, 타불라의 늑대). 심지어 게임 상에 규칙이 없고 게임 진행 과정에서 서로간의 협상과 투표를 통해 자기에게 유리한 규칙을 정해가는 게임도 있다(데모크레이지). 참여자들 사이의 순위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 공동의 임무를 수행해가는 협력게임이라는 장르도 있다(팬데믹). 이런 게임은 기업 연수의 팀빌딩워크샵에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의 가치관, 정서, 화법, 성격, 기질, 재능, 매력 등이 드러나는 기발한 보드게임의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이처럼 보드게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그리고 함께 노는 사람들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요구하는 놀이문화이다. 내가 보드게임의 의미와 가능성을 보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놀 것인가?’라는 우리 시대의 화두에 대해 나는 보드게임이 하나의 가능성과 대답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보드게임이 참 좋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보드게임이 매개해주는 사람과의 만남이 좋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터지는 웃음, 주사위 하나에 터지는 탄성, ‘나 잘했지?’, ‘대단한데?’, ‘너였어?’, ‘속았다’, ‘분하다등 수백가지 얼굴표정이 살아있고, 사람과 더불어서 사람 냄새나게 노는 이 보드게임이라는 세계가 정말로 좋다. 그래서 나는... 보드게이머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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