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홀로코스트 연구분야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책이다.

나치와 소련의 집단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사유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나간다.
읽는 내내 충격과 감동이 번갈아 마음을 때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초현실적 악행이 주는 충격과, 그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과 죽어간 이들이 주는 감동이 그것이다.


책을 읽으며 세월호 유가족들도 생각났다.
수용소 생존자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들이 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 준 가장 큰 힘은 '증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는 것이다. 
희생자들이 계속해서 늘어갈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그 수많은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진실을 증언할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렇지 않을까.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을 대신하여 진실을 증언할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믿음 말이다.
그래서 그 분들은 결코 진실을 밝혀나가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리라.


책도 좋지만, 역자 후기도 참 인상적이다.
역자는 이 책을 세 번이나 번역했고 34년간 이 책을 붙들고 씨름해왔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후기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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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더보스>, 협상게임, 3~6인가능, 4~6인추천


보드게임 중에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협상게임”입니다. 

협상게임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들 간의 협상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는 게임을 말합니다. 

협상게임은 대화의 기술을 통해 이끌어가는 게임입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얻어내고자 거래를 제안하고 중재하고 때로는 베짱튕기고 뒷통수를 치기도 하며 나타나는 협상게임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보드게이머들에게 최고의 협상게임이 무엇이냐 물으면, 보통 ‘3대 협상게임’으로 알려진 <아임 더 보스>, <차이나타운>, <제노아>를 꼽습니다.

이 3대 협상게임 중 가장 쉬운 난이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유쾌하고 흥겨운 분위기의 게임이 <아임 더 보스>입니다.

(기본적인 게임소개와 규칙은 인터넷으로 쉽게 검색이 가능하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5분이면 설명가능한 간단한 규칙 하에서 협상의 천태만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임 더 보스>의 간단하면서도 다양한 협상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멋진 게임규칙은 tvN의 지니어스게임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지니어스 시즌2의 "빅딜게임"이 아임 더 보스에서 차용한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구성원에 따라 어느 때는 화기애애하고 온건한 분위기의 게임이 되기도 하고, 꾼(?)들이 제대로 만나면 인간이 가진 비열함(?)의 끝을 보여주는 게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모이면 절대 흥이 나지 않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거물투자자들간의 비즈니스'라는 게임테마가 만들어내는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분위기 또한 이 게임의 큰 매력요소입니다.

서로 "홍사장님", "박사장님" 불러가면서 갑일 때는 유세도 부리고 을일 때는 아부도 떨다가, 거래가 성사되면 흥겹게 악수를 나누는 유쾌한 분위기가 게임의 흥을 한층 돋구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을 보드게임의 이상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해낸 게임으로 꼽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며, 서로에게 아무리 비열하고 악독하게 굴어도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고, 어떠한 배신과 협잡에도 마음 상하지 않을 수 있는 4~6명의 고정멤버가 있다면 <아임 더 보스>를 추천합니다.

단언컨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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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일본의 한 사회학자가 일본 젊은이에 대해 쓴 책이다. 
일본에서 2년만에 15만부가 팔리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이라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에 비해 삶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인해 이른바 '사토리세대(득도세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사토리세대 현상은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이 가진 작은 경제력에 만족하고, 또한 자신이 속한 작은 준거집단 속에서 충족감을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조차 부모세대의 경제적 지원이 젊은 세대의 빈곤을 어느 정도 상쇄해주기 때문에 유지되는 측면이 있는데, 10-20년 후 부모들의 경제력이 감소하는 시점에 이 세대 또한 심각한 빈곤의 문제를 겪게 될 것으로 본다. 
즉, 그들의 행복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유보된 불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토리세대를 낳은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미래 일본은 ‘느슨한 계급사회’의 모습을 띌 것이라 전망한다.
그렇다고 우석훈처럼 ‘젊은이여, 일어나라’고 외치는 비장한 논조는 아니며, 그냥 그렇다고 아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여러모로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내셔널리즘과 젊은이’에 대해 논하는 3장이 참 인상적이었다.
과거 일본은 내셔널리즘을 활용하여 수많은 자국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뿐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들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몰아넣은 전범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더 이상 국가를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통계에 의하면, 일본 젊은이들 중 전쟁이 나면 도망치겠다고 응답한 이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일본의 기성세대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에 개탄했겠지만, 저자는 이처럼 일본이 망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은 젊은이들의 출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젊은이들이 적다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니 적어도 태도 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저자에게서 내셔널리즘을 향한 강한 냉소가 느껴진다.
더 이상 내셔널리즘이 먹혀들지 않은 젊은이들의 모습은, 젊은이들을 위해 해주는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애국심에 호소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기성세대를 향한 경고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젊은이들을 위하지 않을 때,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런 면에서 이 책에 나오는 사토리세대라는 개념을 한국의 보수언론이 아전인수 격으로 써먹은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최근 조선일보는 특집기사를 통해 일본의 사토리세대를 소개하며 '달관세대'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규정하려 했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에도 이십대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높네. 왜 그런지 알아보자'는 것과 '거봐. 행복은 마음 속에 있는거야. 구조타령하면서 불평하지 말고 너만의 행복을 찾아봐'라고 훈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사회학적 접근'이지만, 후자는 '개수작' 또는 '저열한 꼰대질'이다.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이 바다 건너에서 이런 개수작에 이용된 것을 알면 얼마나 씁쓸할까 싶다.


이 책에는, 젊은이들에게 일본을 위한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생존과 안전을 도모했던 전시 일본의 기성세대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일보는 그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민족언론을 자처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언론으로 돌아섬으로서 그들의 애국심이 얼마나 알량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었던 조선일보 아니었나. 
그랬던 자들이 나중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애국심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지겹도록 우려먹었는가. 
‘산업화의 역군’ 어쩌고 하며 젊은이들을 착취하는 선전도구로 말이다.

그들을 향해 이 책은 ‘더 이상 애국심에 호소해서 젊은이들 이용해먹을 생각하지 마라. 더 이상 일본을 위한 젊은이도, 대한민국을 위한 젊은이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런 책을 가지고 달관세대 어쩌고 떠들다니, 이건 대책없는 난독증인 걸까? 아니면 이해력 부족을 가장한 뻔뻔함인 걸까?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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