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서술하는 방법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우선, 역사 속의 주요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이것은 언제나 역사연구의 일차적 관심사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정치사적인 접근'은 오랫동안 역사연구방법론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반면, 주요사건의 연대기 중심 역사서술에서 소외된 전체적인 사회상과 사회구조 그리고 그것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일반대중에 관심을 가지는 접근법이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아날학파가 대표적이다. 우리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아날학파와 강조점은 좀 다르지만- 연대기 서술보다는 그 역사를 통과해온 민초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가능하겠다. '민중사적 접근'이라고 부를수 있으려나?
한국근현대사를 이러한 '민중사적인 접근'으로 가장 훌륭하게 서술해낸 분은 단연 -역사가가 아니라 소설가인- 조정래 선생님일 것이다.
그의 대하소설 3부작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 광주까지의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한다. 그의 소설에서는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이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과 이야기와 함께 절묘하게 어우러져 돌아간다. 그럼에도 독자가 무엇이 픽션이고 무엇인 논픽션인지 대부분 구분해 낼 수 있도록 쓰여져 있다. 그것이 바로 이 3부작이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닌 소설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역사교육자료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저항, 해방후 분단과 6.25전쟁의 비극, 한강의 기적과 군사독재의 명과 암, 민주화운동의 좌절과 환희를 통과한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웃음의 기억이다. 이것이 바로 연대기 서술 위주의 정치사적 접근만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조정래의 소설엔 이 시대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정교하게 얽혀 짜여져 있으면서도, 그 중심인물들은 철저히 그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온 이름없는 민초들이다. 그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온 우리의 선조와 선배들이 무엇에 울고 웃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게 된다. 여기가 조정래 3부작이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가지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한강]을 집필한 후에 쓴 후기인 “[한강]을 마치며”가 10권의 말미에 덧붙여 있다. 이 후기를 읽으면 정말로 마음이 먹먹해진다.
기침병, 위궤양, 종기, 극심한 몸살, 오른팔 마비, 탈장 등 온 몸이 상해가면서도 불타는 사명감으로 자랑스런 민족문학이자 대체불가능한 역사자료를 남겨주신 조정래 선생님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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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강남 좌파'라는 화두를 처음 제기했던 장본인인 강준만이다.
그런데 용어의 저작권(?)을 가진 원조가 쓴 강남좌파론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이 책은 강남 좌파에 대한 비난도 아니며 그렇다고 옹호론도 아니다. 게다가 강남 좌파에 대한 기존의 개념정리 자체를 뒤엎어버린다. 심지어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란다.
이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라는 도발적 주장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전혀 공통점을 가늠해볼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만큼이나 혼란스럽다(이들이 모두 강남좌파? 심지어 박근혜까지??!!).

그가 강남 좌파를 말할 때의 '강남'은 지리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한국사회의 엘리트, 부유층,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상징언어이다. 강남 좌파의 ‘좌파’ 역시 이념적으로 반드시 왼쪽으로 분류된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이 위선이든 진정성 있는 것이든 간에 - 다수의 서민대중의 입장을 대변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언어이다. 이 프레임을 받아들인다면 왜 그가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라고 주장하는지 비로소 납득할 수 있게 된다.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고학력과 거기서 비롯된 상류층 인맥, 그리고 중산층 평균을 훨씬 웃도는 재력으로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대부분 이 ‘강남’이라는 상징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사들이다. 또한 정치인들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바, 민생을 돌보고 서민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게 되는데, 그러할 때에 - 실제로 그들이 취하는 노선이 좌이든 우이든 간에 - 그들은 좌파적 상징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모든 정치인은 자신의 생활양식(강남)과 정치적 슬로건(좌파)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 사이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각각의 정치인들에게 나타나는 이 괴리의 편차는 매우 크다.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같은 부류로 싸잡아 버리는 것이 저자의 의도는 결코 아니다).

저자는 강남 좌파의 정의를 이와 같이 확대한 후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인들(그의 분류에 따르면, 대부분 강남 좌파들이다)을 하나씩 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별 분석(대부분 미래의 유력대권주자)은 책의 본론이라기보다는 부록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출간된 책이므로 저자는 유력대권주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시해주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 책의 본론이라면 그가 책의 서두에서 강력히 주장했던, ‘한국 정치는 인물 중심의 정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순된다고 할 수 있겠다.
풍부한 자료제시를 바탕으로 한 강준만 특유의 흥미진진한 글쓰기는 이 책의 매우 큰 강점이다. 고 노무현,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에 대한 그의 흥미진진한 썰(?)풀기는 독자로 하여금 시간 가는줄 모르고 빠져들게 한다.
특히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일부 친노인사들의 과오에 대해 매우 강도높게 비판하는데 새겨들을만한 부분이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진보-보수 프레임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좀 더 직시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사실상 그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논점은 -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이념논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엘리트들 간의 밥그릇 싸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거칠게 말하자면, 강남 좌파로 불리게끔 만든 좌파 담론 또는 제스처가 정치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을 무슨 심각한 이념 투쟁인 양 포장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어느 정당 소속이건 다선 의원이 낙선한 지역의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 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출세, 입신양명, 인정욕구 충족의 도구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엘리트는 모두 ‘강남파’일 수밖에 없다. 강남 좌파에서 ‘좌파’는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제한된 정치적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승자 독식 상황에서 이념과 노선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쟁 세력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략적 도구의 성격이 강해진다.“  - <강남 좌파> p394

그가 이 책을 통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 장 - chapter11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은 입시전쟁(강남 좌파는 학벌 좌파) - 에서 드러난다. 그는 정치판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뿌리 깊은 엘리트주의의 병폐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을 본다.
명문대 인맥을 통해 서로 얽히고 설켜있는 엘리트들이 유력인사에게 줄서기와 줄대기를 통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선거 한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뒤바뀌니 거기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승패가 갈리고 곧이어 승자와 승자에게 줄선 자들의 권력 독식이 이어진다. 결국 정치가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이 되는 것의 이면에는 학벌주의라는 거대한 몸통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학벌주의를 얼마나 극복해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실명을 통한 인물비평으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이 사람이 좋으냐 저 사람이 좋으냐'하는 품평보다는 우리의 정치 풍토와 한국 사회의 에토스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의 문제의식은 깊이가 있으며 해법 제시 역시 매우 예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결론이 용두사미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 결론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런 책 한권으로는 꿈적도 하지 않을 뿌리 깊은 학벌주의의 거대한 벽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로 그 견고한 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일으키려는 시도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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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가지고 있는 명성에 비해 사실상 특별히 새로울 만한 내용은 없었다.

윤리학의 역사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라는 두 축 사이에서의 진자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시 그 두 범주를 사용하여 양 쪽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들을 택하여 알기 쉽고 실제적인 예화들을 사용해가며 논점의 차이들을 흥미롭게 부각시켜나간다. 그리고 결론부에 가서 자신의 견해인 ‘공동체주의’를 제시하며 목적론적 윤리의 손을 살짝 들어주는 것으로 책을 끝맺는다.

책을 읽으며,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주장하는 '덕의 윤리, 성품의 윤리'와 저자의 주장 사이의 연관성을 떠올려보게 된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샌델과 하우어워스는 각각 일반윤리와 기독교윤리의 영역에서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가장 주목받는 학자들인 셈인데, 이들은 가까이로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멀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제목으로 인해 정의에 대한 가슴 시원한 답변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내 사견이지만 이 책은 초강대국의 일류대학 강의실에서 나타나는 정의에 대한 담론이 가질만한 예상 가능한 약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저자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의 한계를 예리하게 짚어내면서 윤리의 영역에 공동체적 가치와 도덕을 복권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그가 좋은 관점을 가진 훌륭한 학자임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논의는 시종일관 제1세계 학자가 가진 관점의 한계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하긴 강의의 목적 자체가 정의를 추구하기를 촉구하는 것보다는 정의에 대한 사고를 자극하는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이같은 평가가 다소 야박한 감은 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주제보다는 저자의 탁월한 전달력에 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는 ‘강의란 무엇인가’를 더욱 확실히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샌델의 강의가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가 되었는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주제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여서, 읽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참고한다면 효과적인 전달과 소통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S. J.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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